예수평론

광해와 예수

sonjengho 2012. 10. 6. 11:05

광해- 왕이 된 남자 그리고 예수


영화 광해의 스토리는 이렇다. 광해군이 독살의 위험에 처하자 대용물인 자기 닮은꼴 광대를 광해로 내세워 안전을 도모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다가 광해 축출 세력의 미인계에 빠져 양귀비를 많이 마셔 중독되어 안가에 모셔진다. 보름 간 치료를 받는 동안 가짜 광해가 왕행세를 진짜 광해처럼 한다. 그 기간 동안 가짜 왕은 진짜 왕과는 달리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어서 주위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다가 가짜 왕이란 것이 탄로가 나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다. 이 때 가짜 광해의 진정한 통치 행위에 감명을 받아 마음이 변한 최측근과 경호대장과 소녀 시중이 그의 편에 서서 그의 목숨을 구한다. 그 와중에 진짜 광해가 회복하여 권좌에 복귀하고 따라서 가짜 왕을 사형에 처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추격대는 도망 친 가짜 왕을 죽이고자 따라 붙인다. 이제 사형 집행을 하고자 할 순간에 가짜 왕의 참된 왕노릇에 감동을 받아 그를 진짜 왕이라고 고백하는 경호대장의 저항과 싸움 덕분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짜 왕은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경호대장에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안 되겠다 싶어 다시금 경호대장이 싸우고 있는 전투 현장으로 돌아온다. 경호대장은 싸우다가 죽고 돌아온 가짜 왕에게 자기에게는 당신이 진짜 왕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가짜 광해는 탈출에 성공해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이국땅으로 향한다. 그리고 진짜 왕은 복귀하자마자 공백 기간에 가짜 광해가 수행한 통치 행위의 기록을 살펴보고 적지 않게 배운다.


가짜 광해를 대용 인간으로 내세워는 것은 감독의 매우 창의적인 발상이고 바로 이것이 영화의 흥행을 주도한 요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대용 인간이 대용물이 아니라 참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스캔들이다. 가짜 광해는 왕이 아니고 왕인 척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왕노릇하는 가운데 자기 내부의 인간성과 선함이 싹트고 참다운 왕처럼 다스리는 일을 구현하게 된다. 우리도 보기만 하지 않고 현장과 상황에 동참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변하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가짜 광해가 그렇다. 전혀 어전 회의나 각료 회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몰랐지만 허균의 과외로 알아가기도 하고 여전히 까막눈이기도 하다. 하지만 왕의 본분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은 천민이든 아니든 보편적 앎이었다.  그는 이 점에서는 분명했고 또 가짜 왕노릇하면서 실천했다. 이러한 실천이 곁에서 도와준 최측근 허균이나 내시나 경호대장이나 수랏상을 준비하는 계집 종 사월이나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변화시켜 놓는다. 이들 모두는 가짜 왕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모두 자기 목숨을 걸고 도와준다.


가짜 광해의 실천은 그 실천을 보는 사람, 그 실천을 도와 주는 사람, 그 실천의 은혜를 받는 사람 모두에게 변화를 가져온다. 그는 광대 출신이지만 왕노릇하면서 자기 의식도 변하고 다른 사람의 의식도 변혁한다. 나의 인간성이 변화할 때 너의 인간성도 영향을 받고 알게 모르게 장기적으로 단기적으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동참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변화의 조짐은 없다. 이것이 인간성 변화의 주요 원리이다. 내가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타인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주요 계기이다. 수랏상 음식 팥죽 짓는 계집종 사월은 왕에게 독극물 타라는 상궁의 명을 거역하고 자기가 독극물 든 팥죽을 시식하고는 죽는다. 대신 왕은 독살에서 구원된다. 경호대장 역시 가짜 왕에게 칼을 들이대는 죽을 죄를 지었으나 가짜 왕의 교훈과 지도로 구제받고 은덕을 입는다. 그리하여 가짜 왕인 것이 탄로가 나서 목숨을 잃을 경각에 나타나서 자기는 죽고 대신 가짜 왕의 목숨을 구해준다. 최측근 개혁파 인물 허균 역시 가짜 광해가 가짜 왕노릇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진짜 광해의 통치 방식에 실망했으므로 가짜 왕이 왕됨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고 역성혁명을 감행하는 과감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자기 목숨을 건 행위이다. 이렇게 가짜 왕의 왕노릇에 감동을 받아 급기야 이제는 자기 목숨을 대신 거는 도박을 거침없이 꾀한다.    또한 허균은 진짜 광해가 권좌로 복귀했을 때 가짜 왕이 무얼 했는지 공부하고 반성하라는 암시를 준다. 그 정도까지 행동한다. 이들의 합심하는 치명적 노력은 가짜 왕을 죽이라는 진짜 왕의 칙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구하는 데 협력하고 또 성공한다.


가짜 왕이야 비천한 광대 출신이므로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그런 그가 잠시 왕노릇하면서 보여준 드라마틱한 언행으로 주위 측근들에게 감동을 주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보답을 받았다. 그의 언행은 해학적이고 코믹하다. 하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는 오버하면  죽는다. 그 드라마틱한 언행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 즉 생명을 내어 놓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자기를 내어놓음으로써 목숨을 구한다.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가짜 광해의 행동과 그 결과를 보면서 예수의 삶의 궤적을 평행시켰다. 예수는 자기 제자를 가르치고 변화시켜 자기를 따르게 했고 자기처럼 행동하게 키웠다. 가짜 광해처럼 천민 출신이 아니라 천상 출신의 고귀한 분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줌으로써 여기에 감동을 받은 자들이 이제 역으로 그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결과에 이른 것이다. 출생이 하나님에게 있는 예수가 무엇이 아쉬워서 인간에게 내려와서 자기를, 자기 목숨을 주는 것인가? 실로 그는 우리에게 홀라당 다 주었다. 사실 예수는 큰 역사적 시야에서 보면 인류의 복지와 번영을 위해서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준 것이다. 가짜 광해처럼 천민 출신이 아니라 천상 출신의 고귀한 분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줌으로써 여기에 감동 받는 자들이 이제 역으로 그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결과에 이른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그렇게 여겨지고 고백되게 되는 것은 인간 자연의 힘이 아니라 초자연적 힘 즉 성령의 일이라는 것이 항상 스캔들이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몰랐다가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물의 모든 것인 예수가 하나도 남김없이 자기를 아낌없이 우리 인류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교리적으로 지적으로 기계적으로 설익게 외워지고 세뇌되고 반복되어서가 아니라 진정 그의 마음과 존재와 삶과 흔적이 우리의 현재 삶을 전복시키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깊이 더욱 깊이 침잠되어야 한다. 급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이 벽을 뚫지 않고는 나의 목숨이 초개 같이 내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