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허구적 이미지들과 진정한 맨살
[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포럼 참고자료 ②]
박정희 시대의 허구적 이미지들과 진정한 맨살
대한민국은 동남아시아의 가문 정치의 예를 따를 것인가?
2012년 대선에서는 특징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박근혜라고 하는 1960, 70년대 독재 지도자의 딸이 집권당의 대선 후보로서 출마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접근하고 싶은 관점은, 단순히 박근혜가 12월 대선에서 당선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한국의 정치가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선례를 따를 것인가 아닌가 하는 지점이다. 사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명문 출신 정치인이 자기 가문의 정치적 자산을 배경으로 유력 정치인이 되거나 심지어 대통령이 되는 사례가 많다. 필리핀 전 대통령 아로요 같은 경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들 중에도 명문 가문 출신의 2세대 또는 3세대 정치인 이 많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조차도 공천 관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녀도 비리 혐의로 곤혹을 치렀으면 치렀지, 선대의 정치적 자산을 밑거름으로 2세대 정치인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과연 박근혜가 이런 현상을 역류하여 성공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나는 부정적인 예상을 한다. 전 독재자 박정희의 후광으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예상하는 것이다. 물론 박근혜가 박정희의 후광으로만 유력 정치인이 된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비리 혐의로 곤혹을 치룰 때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식으로 천막 당사를 치고 버텨 당의 위기를 넘기게 만드는 등, 자력으로 나름의 정치적 자산을 쌓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 뭐래도 박근혜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은 박정희에서 유래한다. 박근혜만 보면 눈물이 글썽이는 영남의 아주머니들에게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 2세대나 3세대 정치인이 힘든가 하는 점을 천착해볼 때,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 국민들의 정치적 민도가 대단히 높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높은 민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있으며, 변화를 바라면서 새로운 정치인과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근혜가 당선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새누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박정희 시대가 부활한다는 뜻이다. 결코 박근혜를 박정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박근혜가 움직이니 박정희 시대의 유력 인사들도 움직이고, 이런 현상의 하나의 징표로서 이미 6인회라고 하는 것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박정희 시대의 허상에 도전하는 식으로, 박근혜의 당선은 한국 사회와 정치의 거대한 후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
박 정권의 전 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먼저, 통상적으로 한국의 보수는 박정희 시대를 “조국 근대화”가 급속히 일어난 “기적 같은 시기”로 묘사한다.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시기는 거의 매년 “정치적 위기”의 때이기도 했다. 그만큼 전 국민적 저항으로 첨예한 갈등이 전개되었던 시기였고, 그만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가 지속된 때이기도 했다. 사실 박정희 시대를 독재 시대라고 하는데, 독재는 장기 집권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폭력과 폭압으로 강압적 통치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국민들이 박정희 체제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저항하니까 박정희 정권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통치를 했던 것이다.
연도 |
조치 |
1961. 5 |
군사 쿠데타 |
1961. 5 - 1962. 12 |
비상계엄 |
1963. 10 |
전국 비상 계엄령 |
1964. 6 |
비상계엄(6ㆍ3사태) |
1965. 8 |
서울 위수령 |
1971 |
교련 반대 시위 및 대학 휴업령 |
1971. 10 |
서울 위수령.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 진주 |
1971. 12 |
국가 비상사태 선포 |
1972. 10 |
10월 유신 선포. 전국 비상계엄 |
1974 |
긴급 조치 1호와 4호 선포 |
1975 - 1979 |
긴급 조치 9호 |
1979. 10 |
부산 비상계엄 및 마산ㆍ창원 위수령 |
1979. 10. 26 |
박정희 시해 사건 |
<박정희 지배 하에서의 강압적 조치의 시행 연도와 내용>
청렴했다는 거짓된 이미지
다음으로 박정희 시대는 부패가 적었던 시기로 간주된다. 죽음 후 박정희는 청와대의 방에서 변기의 물을 담는 수조에 벽돌을 괴서 사용할 정도로 검소했으며 막걸리를 먹는 텁텁한 대통령의 이미지로 표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이미지는 관제 언론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더구나 1990년대 이후 민주화 시기처럼 언론이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패 사안의 보도 자체가 억압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주도 세력의 초기에는 기성 정치인의 부패를 비판하는 일관성 있는 “반(反)부패”적 정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스스로 구조적 부패의 담지자들이 되어갔다. 자신들이 내걸었던 “부패 추방” 같은 명분에 대한 경각심이 있었던 초기에는 그나마 부정이 만연하지 않았지만, 체제가 군부 세력 주도로 작동하고 스스로가 특혜를 배분하는 지위에 있게 되면서, 이런 특혜 배분의 반대급부로 대가를 챙기는 관행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군부 출신들의 “결과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과정의 투명성이나 민주성 등은 무시하는 경향을 띠었으므로 이런 관행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부패를 구조화시키는 다른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박정희 정권은 권력 엘리트들을 통합하고 충성을 강화하는 기제로 “돈”을 활용하게 되면서 구조적 부패를 심화시켰다. 초기에 박정희는 반부패를 표방했지만 점차 충성을 강화하기 위해 퇴직 장관이나 고위직 인사에게 “전별금”이나 위로금의 형태로 거액을 “하사”하는 관행을 만들어갔다. 나아가서 각종 관급 공사에서 특혜를 배분받는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관행처럼 수취해서, 이를 지도자의 의중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권력 엘리트들을 통합하고자 했다. 예컨대 1965년경부터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은 재벌들에게서 돈을 거두어서 대통령에게 상납하는 역할을 했으며, 김성곤이 모금한 내역은 대통령이 직접 결재하고 관리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비의 10%는 무조건 정치 자금으로 상납하는 것도 관행적으로 통용되었다. 고위층에 상납되는 돈 외에도, 직접 공사를 관리하는 중하급 공무원들도 상납을 받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비공식적으로 제공한 자금에 대해서 국세청에서 세금 감면까지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체제의 부패는 어떤 의미에서 구조적인 것이었다.
막대한 격려금을 줌으로써 지도자의 “은덕”에 “감읍”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반(離反)을 방지하고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많은 증언에서 확인되는 바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예화가 기자의 증언에 나온다. 1971년 8월 28일 병을 앓고 있는 서울대 총장에게 돈을 보냈는데, 그 돈의 규모에 감동되었는지 청와대를 향해 절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집중 연재 박정희 육성 증언: 선우연 공보 비서관, 8년간의 육성 비망록 여섯 권, 역사적인 대공개!”, 선우연, 「월간 조선」 1993년 3월, 148쪽). 당시 억대의 돈이 봉투에 들어 있었다고 하니, 하사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장기 집권에 반대해 군복을 벗고 대사로 나간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에게도 아이들 학비에 보태라고 자주 봉투를 보내서 “청와대에서 웬 봉투를 그리 많이 보내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여당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 의원에게도 돈 봉투를 전달했다. 특히 주요 군 지휘관들에게는 상당한 자금과 혜택을 주었다. 촌지 봉투가 박정희 리더십의 한 곁에서 부패를 동원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이런 점이 “옥의 티”거나 통치의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박정희 체제의 중후반으로 갈수록 이는 점점 더 구조적인 관행으로 고착되었다.
실제로 박정희가 죽은 후 청와대 금고에서는 지금으로 치면 수백억 원에 달하는 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재미 교포 문명자의 증언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에도 이후락을 통해서 관리되는 돈이 있었으며,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당시 일본 은행에 2백만 달러를 예치했다고 한다(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월간 말」, 1999년, 216쪽).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 집권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퇴임 후 자금을 모아 둘 필요가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많은 액수였다. 단지 높은 성장이 지속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국가의 부패 또는 약탈이 상쇄됨으로써, 부패가 성장에 대해서 가지는 부정적 요인이 구조적 위기로 표현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우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박정희 체제는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고도성장을 추동하는 국가는 그 막강한 권력으로 인해 부패가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조건 속에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정희 정권은 전략적 측면에서 좀 더 능동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촉진하기 위해 전별금이나 위로금의 형태로 경제적 혜택을 부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조직적으로 음성 정치 자금을 조달하는 부패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박 정권은 “약탈적” 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민주화 시대 이후 부패가 더 확산되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는 사회가 상대적으로 투명해지고 반부패 의식이나 반부패 운동이 강화됨으로써 이전에 비해 “적발”이 더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패 사건의 노출 자체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부패 사건에 대한 언론의 감시 기능도 독재 시대와 달리 훨씬 폭넓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부패가 많이 노출되고, 그 결과 마치 독재 시대에 비해 부패 자체가 확산되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인식의 전도된 모습이다. 우리는 “청렴한 박정희”, “막걸리 먹는 소탈한 박정희”의 이미지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새삼 반추해보아야 한다.
언론에 대한 박 정권의 폭력성
다음으로 박정희 정권이 언론의 감시와 저항적 운동에 대해 비관용적이고 폭압적이었음을 살펴보자.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 대해서는 일반 국민들도 폭압적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나마 낫다고 여기는 1960년대의 예를 보겠다.
먼저 상징적 사례로서, 당시 정부 비판의 선두에 있었던 천주교 재단 소속 「경향신문」에 대한 탄압이 있다. 「경향신문」은 1964년 5월 연재물인 “하루는 책보 이틀은 깡통: 대전에 목불인견의 구걸 대열”이라고 하는 기사와 “허기진 군상: 칡뿌리 먹는 가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문제로 1965년 5월 13일 사주 겸 사장이었던 이준구와 사진부 손충무 기자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정희로부터 「경향신문」을 정부 소유로 만들라는 엄명을 받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은행 부채를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1966년 1월 경매를 강제로 시행하여 당시 기아산업 대표에게 신문을 인수시켰다. 이후 「경향신문」의 논조는 급속히 박 정권 일변도의 신문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에 신문은 우여곡절을 거쳐 박 정권이 통제하던 MBC에 인수되어 박 정권의 친위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강제 당한다. 1964년 6월 4일과 5일에는 동아방송의 “앵무새” 프로그램이 부패 사건을 비판했다는 이유를 6명의 간부가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한 1964년 11월에는 대전방송국에서 빈부 격차를 다룬 “송아지”라는 프로그램을 책임졌던 편집부장 김정욱이 반공법으로 구속된, 이른바 “송아지 사건”이 있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한창이던 1965년에는, 한일회담에 비판적ㅇ니 언론인에 대한 테러도 있었다. 1965년 9월 7일 밤에는「동아일보」편집국장 대리 변영권의 집 대문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의 집에 괴한이 들이닥쳐 그를 납치하여 노상 구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또한 박 정권은 1966년 4월 5일부터 「조선일보」가 시작한 연재 기사 “부정부패를 추방하자: 우리는 탁류 속에 밀려가고 있다”를 정권 비판 기사로 인식하여 “세무 사찰과 은행 융자금 회수, 신문 용지 배당 중단” 등의 협박을 가하였다. 당시 주필이던 최석채 기자는 박정희를 만나 사죄하고 양해를 구해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1966년 4월 25일에는 「동아일보」의 최영철 기자가 박정희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소신은 만능인가”라는 기사를 쓴 후, 골목길에서 괴한 2명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후 최영철을 해직시키라는 협박 편지가 배달되기도 했다. 7월 20일에는 「동아일보」정치부 차장 권오기가 괴한으로부터 전치 10주의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67년 2월에는「동아일보」정치부장 남재희 등 4명의 정치부 기자들이 수사 기관에서 47시간 동안 억류된 사건이 있었다. 1967년 1월에는「호남매일신문」기자가 군 장교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강원일보」사회부장 집에 괴한이 침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6월 17일에는「동아일보」기자 이종율과 박지동,「조선일보」기자 박범진과 김학준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하지만 사실「사상계」만큼 당시 정권의 탄압을 많이 받은 잡지도 없었다. 정권과의 타협을 거부한「사상계」는 호된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한일회담 당시 여기에 비판적이었던 이 잡지는 테러의 위협 때문에 1965년 10월 호부터는 편집위원 명단을 게재하지 않기도 했다.
반공법과 남정현과 천상병
박 정권의 정치와 언론, 저항 운동에 대한 탄압은 반공주의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어떤 점에서 비판 세력에 가해지는 폭력의 중요한 명분이 반공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박 정권은 반공법을 활용해 정부에 대한 진보적 비판을 탄압했고 이로 인해 지식인들이 고초를 당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분지”(糞池) 사건을 들 수 있다. 남정현은「현대문학」1965년 3월 호에 실린 자신의 소설 때문에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다. “썩어빠진 국회와 정부”에대한 비판과 반미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심지어 남정현의 구속에 항의하는 글을 쓴 백낙청과 원고를 청탁한 남재희 문화부장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천상병의 경우에는 박 정권의 폭력성을 세상에 알린 유명한 사례다. 동백림 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는 동안 천상병은 중정에서,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전기 고문을 무수히 당했다. 중정에서 풀려난 후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유치(留置)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이 동원하고 강화한 반공 앞에서,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무소불능의 권력 앞에서 처참하게 짓밟히는 시인의 삶을 보여준 이 사건은, 이런 폭력성이 시대의 단면임을 웅변하는 것으로 문학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심지어 1967년에는 “남한에서는 쌀값이 수시로 변하고 농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돈 있는 사람은 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산다”라고 말한 사람이 군사상 기밀 누설 명분으로 반공법으로 구속되는 사례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 강준만은, “‘돈 있는 사람은 잘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산다’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뻔한 진리마저도 그걸 발설하는 한 군사상 기밀을 누설하는 걸로 간주되었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제3권, 인물과 사상사, 123쪽). 리영희 필화 사건ㅇ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조선일보」외신부 기사였던 리영희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안건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검토 중”이라고 하는 기사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적성 국가나 단체의 고무, 찬양을 금지하는 반공법 4조 2항을 위반했다는 죄목이었다.
앞에서 본 대로, 박 정권은 정부 시책에 대한 낮은 수준의 비판에서부터 이념적 쟁점이 제기되는 사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반공법을 적용하여 탄압했다.
박 정권의 붕괴는 자체적 도덕적 붕괴다
박 정권의 붕괴는―민중의 저항을 기본 요인으로 하고 있지만―사실상 군부 권력 엘리트 자신의 도덕적 붕괴의 성격을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기에는 기성 정치인의 부패를 비판하는 우국충정의 자세를 일면 가졌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부패의 화신이 되는 동시에 동료들의 부패를 목도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박 정권에 대한 도덕적 자부심을 상실하고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해갔던 것이다.
권력 엘리트들의 도덕적 자부심을 실추시키는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 예를 들자면 1970년 3월 발생한 정인숙 사건이 있다.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이 여동생을 한강변에서 살해한 이 사건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박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왜냐하면 정인숙 사건에는 당시 정일권이나 박정희 등 권력의 핵심 인사가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 정권의 수뇌부는 이른바 “요정 정치”에 광범위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 서울에는 비밀 요정을 표한해서 100여 개의 요정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계의 거물들을 모시는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다. 많은 경우 이곳은 재계 인사와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고 정치권의 회의 장소이자 호화 호색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박 정권의 주요 현안은 요정에서 결정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심지어 이후락의 지원을 받는 삼청각의 개업식에는 이후락을 포함해 중앙정보부 요원 50명이 참석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주간지와 월간지 등에서 다루어지고 유언비어로도 확산되면서, 박 정권의 도덕성의 기반이 붕괴되어 갔다는 것이다.
또한 요정의 고위층에 대한 중정의 정보 수집 통로이기도 했다. 요정 주인이나 접대부들은 중앙정보부의 요원 노릇을 강요당했다. 직접적으로 망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수시로 중정에 불려가 자신들이 지득(知得)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중정에 협조하지 않으면 요정이 폐쇄당한다고나, 요정 출입 탤런트가 TV에 출연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박 정권의 붕괴는 도덕적 자부심의 붕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점은 모든 체제의 말기적 모습이기도 하다.
10·2항명 파동에서 보인 박 정권의 야만성
앞에서 살핀 도덕적 붕괴와 함께, 박 정권의 종말은 정권 자체의 야만성에 기인했다. 박정희에게 권력이 무한대로 집중되면서 그의 일부 측근은 심지어 쿠데타를 같이 했던 군부 권력 엘리트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야만성을 보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의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민주공화당은 박정희의 1인 권력 체제로 전환되어갔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충성파 및 중정 등 공안 기관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는 상황이었다. 1971년 10·2파동은 유신으로 가는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서 중정을 중심으로 한 박정희 극렬 충성 그룹의 폭력적 반격이었다.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이 날 때만 하더라도 박정희에 대한 핵심적인 충성 그룹으로 공화당의 중심에 있었던 김성곤, 김진만, 길재호, 백남억 등 4인방이 이 10·2파동으로 제거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야당이 발의한 내무부 장관 오치성 해임 안이 통과된 일이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20여명의 공화당 의원이 야당의 해임 안에 찬성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4인방의 오만이자 박정희에 대한 항명으로 규정이 내려졌다.
당시 증언을 들어보면 박정희가 “주동자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반쯤 죽여가지고 공화당에서 내쫓아라”라고 말했다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해임 안이 가결된 수 중정은 박정희의 지시 하에, 4인방을 포함해 공화당 23명을 연행하여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극심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당시 김성곤 의원은 중앙정보부 수사관에 의해 콧수염이 반만 뽑혀 밖에 다니지도 못했다. 육사 8기로서 5·16쿠데타 세력 중 한 사람인 길재호 의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후에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는 중앙정보부는 “마치 암흑가 폭력 조직의 보스가 등 돌리는 부하를 잡아다가 린치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행동을 했다.”
10·2파동은 권력 엘리트 내부에 심각한 상흔을 남긴 사건이었다. 즉 박정희에 대한 극렬 충성 이외에 다른 “다원적인” 행동 양식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명하게 보여주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충성을 극도로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10·2항명 사건은 정보부의 폭력이 저항 그룹에게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공화당과 지배 블록의 구성원들에게도 가해질 수 있음을 각인한 사건이었다. 이는 공화당 의원들의 심적 이반, 권력 엘리트의 결속력의 약화 등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조갑제조차도 어딘가에서 “10·2항명 하동 이후 여권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습니다. 공화당은 독자성을 잃고 슬슬 기기만 했습니다. 공화당 운영은 위탁 경영에서 대통령 직영 체제로 바뀐 것이지요”라고 쓰고 있다.
1인에게로 향하는 권력 집중과, 충성파 이외의 비판적 그룹에 대한 폭력 행사 및 제거 과정은 지배 블록 내의 도덕적 결집력과 기풍을 급속도로 약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또한 이 과정은 지배 블록에 속하던 성원들 일부가 이탈하여 저항 운동에 참여하는 과정도 동반했다. 이리하여 이른바 재야에는 지식인이나 야당 인사뿐만 아니라 여당 이탈파도 등장했다. 예컨대 1969년 공화당에서 제명된 양순직, 예춘호 전 의원들은 재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5·16이후에는 저항 진영의 일부가 분열하여 쿠데타를 지지하고 이에 포섭되었다면, 이제는 권력 엘리트의 일부가―예춘호처럼―운동 정치에 합류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젊은 세대를 도덕적으로 훈육하고자 했던 국가
마지막으로 박정희 정권 말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발 단속과 미니스커트 단속 이야기를 해보자. 현재의 자유로운 젊은 세대가 박 정권 당시의 단속을 당했더라면 더 큰 저항을 했을 것이라도 나는 믿는다. 아마 혁명이라도 났으리라.
1973년 6월 16일 언론인 출신의 문화공보부 윤주영 장관은 자숙해주기를 요청하면서 “방송이 조속한 외래 풍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내용의 저속화는 물론 퇴폐풍조를 확산시키고 있다”고 질책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 개인을 포함하여 박 정권의 주도 세력이 젊은 세대의 새로운 문화 현상에 대해 강력한 도덕적 훈육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도덕적 훈육 국가의 모습은 젊은 세대에게는 “폭력적인” 단속으로 나타났다. 대체로 장발을 한 대학생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장발 단속은 일족의 정치적 저항을 제어하려는 시도였다. 1973년 3월 10일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개정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된 날이었다. 이미 1970년 8월, 1971년 1-월에도 전국적인 일제 장발 단속이 있었고 개정 이후 1973년 9월, 1974년 4월, 1975년 4월에도 집중적인 장발족 일제 단속이 이루어졌다. 1973년 장발 단속 실적은 12,870건이었다. 또한 1974년 6월 1일부터 장발 단속에 나선 서울 시경은 8일까지 10,103명을 잡아 이중 9,841명의 머리를 깎여 훈방했고, 머리 깎기를 거부한 262명은 즉심에 넘겨졌다. 1976년에도 5월에서 6월까지, 1개월간의 단속 기간이 있었는데, 이때 단속 기준은 “공무원형” 조발, 즉 “옆머리는 귀의 윗부분을 조금도 덮지 않고 뒷머리는 옷깃 윗부분을 가리지 않는 단정한 형태”였다.
1969년 8월 제주시에서는 무릎 위 30cm의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이 사상 초유로 즉심에 회부되어 25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 1973년 3월 박 정권은 무릎 위 17cm 이상 올라가는 미니를 과다 노출로 규정하고 이를 경범죄 처벌법에 포함시킴으로써 처벌 기준을 강화했다. “한 손에 가위, 다른 손에 자를 들고” 단속에 나서는 풍경을 상상해 보자. 이렇게 지나가는 여성을 세워놓고 미니스커트가 무릎으로부터 얼마나 올라가 있는가 수치를 재는 경찰의 모습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1973년 4월 26일에는 무릎 위 20cm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천안시의 20대 여성이 개정 경범죄 처벌법에 의해 2일간의 구류 처벌을 받기도 했다.
국가가 도덕적 계도 역할을 하는 이런 현상은 일견 윤리적인 것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에 개인과 국민들을 일체화하고자 했던 독재 국가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극단적인 정치적 총제 체제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총제 체제였음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국가 엘리트들이 가진 특정한 도덕적 잣대로 이렇게 젊은 세대를 훈육하고 통제하려 했던 모습에서 나는 박정희 시대의 야만적인 모습을 본다. 바로 이런 야만적 모습 때문에 젊은 세대는 더더욱 박 정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저항적 존재가 되어갔다고 믿는다.
어떻게 보면 박 정권은 자신들이 추동한 고속성장으로 인해 변화한 젊은 세대와 충돌했던 것이다. 이는 박정희 국가가 젊은 세대와 정치적으로 괴리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모가 자식을 성인으로 키워놓지만, 이제 성인이 된 자식은 때로 부모와 갈등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박 정권의 “성공적” 성작 전략이 가져온 변화는 이미 젊은 세대를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존재로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통기타를 치고 장발을 늘어뜨리며 기존의 엄숙한 의복 문화로부터 벗어나서 미니스커트를 입으면서 자신을 자유분방하게 드러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도덕적 훈육 의식을 가진 독재 엘리트들은 결국 고속성장으로 인한 변화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문화적으로 적대적 대립을 했다.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배어라”고 하며 자신이 일종의 악역을 담당하게 될 것이고 후세대들은 이 악역이 가져오는 변화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예측이 맞았다. 박정희가 가져온 변화 속에서 잉태된 새로운 존재들, 즉 “개발의 자식들”은 박 정권과 불화하기 시작했다.
글을 마치면서
나는 한국 사회가 박정희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박근혜 시대가 곧 박정희 시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시대는 박정희 시대의 수많은 망령과 암울한 측면들을 되살려낼 것이다. 박근혜의 정치적 자산이 많은 부분 아버지 박정희에 기대고 있다면, 앞에서 서술한 박정희 시대의 폭압과 야만적 모습들을 상기해볼 때, 나아가 박정희 시대의 허구적 이미지들을 뛰어넘어 그것의 진정한 맨살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박근혜 시대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 만일 박근혜 시대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한국 사회의 진보가 아니라 명백한 후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출전: 김근주 외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2012년 대선과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 참여』, 새물결플러스, 2012년, pp. 191-208]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