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부활과 실천

sonjengho 2012. 9. 29. 12:30

 

 

말씀과 함께:부활과 실천 20120928 금 류의근 

 

[본문]

24:1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2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

3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4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다.

5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6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7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8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9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11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새번역 눅 24:1 ~ 24:12)

 

[요약]

예수가 죽은 후 주일 새벽에 몇 명의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예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은 열려져 있었고 예수의 시체는 없었다. 그 무덤 곁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천사)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여인들에게 예수가 생전에 말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해 주었다. 여인들은 이 사건을 11명의 사도와 여타 모든 사람에게 알렸지만 믿지 않았고 베드로만 무덤으로 달려가서 확인하고는 시체가 없음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성찰]

이것은 사건의 객관적 관찰이고 사실적 보고인가? 문학적 표현인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적이다. 만일 이것이 표현이라면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일어났던 일처럼 기술하고 그런 기술을 통해서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처럼. 둘 다일 수 있는가? 둘 다일 수 있다. 사실이자 표현이라면 사실의 기록으로써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표현하고 싶어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에 대한 축자적 믿음보다 그 사실의 의미, 함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더 중요하다. 달리 말해서 기록된 사실에 무게를 두는 것도 두는 것이려니와, 기록된 사실에서 드러나거나 전달되는 의미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실천]

예수의 부활을 천한 여인들은 믿었고 사도들은 믿지 않았고 베드로는 이상히 또는 놀랍게 여겼으나 믿었다는 기록은 없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누가는 왜 이렇게 적었을까? 사실을 기록할 필요가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와 같이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믿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전하기 위해서? 아마도 우리는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하듯이 우리 스스로 부활하지 않으면 부활을 역사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스스로가 부활할 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우리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예수가 우리와 같이 있고 동행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예수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지금 우리의 마음과 현실에 살아 계시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부활을 살아낼 때뿐이다. 이것이 부활을 사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을 살고 있고 부활을 실천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삶이 결여되어 있을 때 나의 삶은 생명 없는 삶으로서 죽은 자로 열심히 사는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