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에베소서 1 2 3장 묵상: 성서부산 정기 공동 예배 본문 텍스트

sonjengho 2013. 5. 13. 10:44

에베소서 1장 묵상

 

성서부산 정기공동예배에서는 현재 매월 마지막 주 월례 예배에서 에베소서 각장을 읽고 또 예배드릴 때 각 장을 본문 말씀으로 삼아 말씀을 나누고 화답하고 교육하며 깨닫는 순서를 가지고 있다. 이에 연동하여 본인은 한 사람의 회원으로서 에베소서를 각 장별로 읽고 묵상하며 교육하며 실천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며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한 그 깊이와 감동과 성령의 역사와 체험을 재현, 추체험하고 싶은 소망있다. 에베소서에 기록된 문자를 절대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예수인들에게 서신을 보내야 했던, 바울의 전존재를 격동케 한 그 내면의 감동과 체험은 무엇이었을까를 환문하면서 뭔가가 나에게도 도래하기를 기대하면서...

 

에베소서 1장을 읽으면 예수의 피로 구속 곧 죄용서를 받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우리가 익히 들어서 잘 아는 구절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의 피로 구속받았다, 죄를 용서 받았다는 말로 바울이 지시하고 했던 실체적인 것은 무엇일까? 예수의 피로 구속 또는 용서 받았다는(1:7) 것이 희생 제물의 피로서 축자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의 피가 마법적 또는 마술적 피가 아닌 이상 그런 능력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부적과 같은 것도 아니기에 무슨 술수를 부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의 희생과 나의 피가 다른 사람의 죄를 구속하고 용서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우리가 그런 비슷한 경험을 가지는 때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대신 책임지고 가는 경우일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면 그는 자유, 해방된다. 그것이 예수의 피로 구속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또 내가 죄 용서를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바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요 체험이었다. 에베소서 1장은 전반부에 거의 찬양과 찬송과 칭송과 영광과 송영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 피력된다. 용어와 어구와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충만한 언어적 표현들이다. 예수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희생과 피가 어떠한 것이길래 바울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자기 인생을 전복시킬 정도로 크게 다가오고 경험되었던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었길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1:13)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17)라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일까?

 

그는 이러한 표현들로 무엇을 상징하고 가리키고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 표현들은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예수의 희생과 피를 비롯하여 그 모두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릴 때 발휘하던 힘,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를 앉히신 힘, 정사정권(rule), 권세(authority), 능력(power), 주권(dominion) 위에 있는 뛰어난 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힘(1:20)이라고 한다.

 

이 힘이 예수의 피와 희생의 발원이라면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은 이 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듣는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은 무엇인가? 그 힘이 임재하면 나도 예수와 피와 희생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가? 그 힘이 임재하면 나도 예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들려주는 메신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나에게 그 힘이 있어야 하겠고 그 힘이 임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언제 어떻게 임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그런데 그 방법은 거꾸로가 아닐까? 그 힘이 먼저 임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 사건과 능력이 임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과 능력이 바울에게 임했으므로 에베소서 1장을 쓰고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조직을 운영하는 목회 서신을 보내게 된 게 아닌가!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이 알기를 바랐던 하나님의 강한 힘과 능력(1:19)이 나에게 임하는 일이 최우선이고 대망의 숙원이 되어야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는 자에게 주고 마는 자에게 주지 않는 그분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예수의 희생과 피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눈으로 보고 믿는 일, 그것이 구속이요 죄 용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충만이다.

 

에베소서 2장 묵상

 

이러한 사건이 바울을 비롯하여 에베소 성도 모두들에게 일어났다. 이것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은 구원(2:8)이다. 그런데 그런 어떤 믿음이고 그 믿음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일단 역으로 계산해보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삶을 살았다는 아는 일(2:1),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산 일을 깨닫는 것,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를 따라서 살았다고 고백하는 일, 불순종하는 자식들 가운데 작용하는 영을 따라 생활했다는 것을 아는 일(2:2), 육신의 정욕, 육신의 욕망과 사고를 따르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을 행했다고 자백하는 일(2:3) 등이다. 이렇게 죄로 죽은 우리 또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일을 보고 아는 것이 하나님의 믿음이고 은혜고 구원이고 선물이고 작품이다(2:5, 8, 10).

 

또 외인으로서 하나님을 모르고 지내다가 하나님에게 가까워진 사실을 아는 것이다(2:13).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적 벽이 없어졌고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2:14).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된 것이라는 것과 악한 일, 악한 마음으로 원수된 상태로부터 해방하고 화해케 된 것을 아는 것이다(2:16). 화해와 하나됨과 평화가 이 땅에 임해서 누려질 수 있도록 한 것이야말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가 이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래는 원수간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가 되어 가족이요 한몸, 한시민, 한민족, 한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난 인류요 새인간성이다. 이것이 가지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함의는 실로 그 당시의 현실 세계를 곰곰이 숙고할 때 혁명적 성격의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체제 위협적 발언으로 낙인 찍힐 위험성이 매우 높았으므로 숨겼지만 그런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저의가 나에게는 읽힌다. 2장은 로마 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새로운 대항 제국을 건설하는 발기문이나 성명서 또는 초안초석(2:20)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에베소서 3장 묵상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제경륜의 비밀은 현실 세계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자유와 해방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탈출, 미래의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제경륜사의 반복적인 구조이므로 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현실 세계에 저항하는 공동체 또는 공동체적 세력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비밀(3:4)은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이 모통잇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가 되어 영원전부터의 비밀(3:9)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알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나 바울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고 환난을 마다하지 않는다(3:12-13).

 

이 뜻을 세상 사람들과 통치자에게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이다. 따라서 전도와 선교는 현행 체제와의 싸움이고 대결이며 갱생이요 회복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이라고 말하면서 의도한 것이었지 않았을까? 너무나 지나친 주관적인 이해요 해석이겠는가? 이러한 전도와 선교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갖가지 지혜들이 알려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찬양으로 고백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을 섬기는(3:7) 과정에서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지고(3:16)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3:18)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며(3:19)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3:20)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저항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견디게 하는 원천이요 또 교회가 그 보호막이 되어야 하는 존재 이유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