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6장 묵상
에베소서 1-6장 묵상
2013. 8. 25.
에베소서 1장 묵상
성서부산 정기공동예배에서는 현재 매월 마지막 주 월례 예배에서 에베소서 각장을 읽고 또 예배드릴 때 각 장을 본문 말씀으로 삼아 말씀을 나누고 화답하고 교육하며 깨닫는 순서를 가지고 있다. 이에 연동하여 본인은 한 사람의 회원으로서 에베소서를 각 장별로 읽고 묵상하며 교육하며 실천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며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한 그 깊이와 감동과 성령의 역사와 체험을 재현, 추체험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에베소서에 기록된 문자를 절대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예수인들에게 서신을 보내야 했던, 바울의 전존재를 격동케 한 그 내면의 감동과 체험은 무엇이었을까를 환문하면서 뭔가가 나에게도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에베소서 1장을 읽으면 예수의 피로 구속 곧 죄용서를 받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우리가 익히 들어서 잘 아는 구절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의 피로 구속받았다, 죄를 용서 받았다는 말로 바울이 지시하고 했던 실체적인 것은 무엇일까? 예수의 피로 구속 또는 용서 받았다는(엡 1:7) 것이 희생 제물의 피로서 축자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의 피가 마법적 또는 마술적 피가 아닌 이상 그런 능력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부적과 주술 같은 것도 아니기에 무슨 술수를 부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의 희생과 나의 피가 다른 사람의 죄를 구속하고 용서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우리가 그런 비슷한 경험을 가지는 때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대신 책임지고 가는 경우일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면 그는 자유, 해방된다. 그것이 예수의 피로 구속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또 내가 죄 용서를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바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요 체험이었다. 에베소서 1장은 전반부에 거의 찬양과 찬송과 칭송과 영광과 송영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 피력된다. 용어와 어구와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충만한 언어적 표현들이다. 예수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희생과 피가 어떠한 것이길래 바울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자기 인생을 전복시킬 정도로 크게 다가오고 경험되었던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었길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엡 1:13)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엡 1:17)라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일까?
그는 이러한 표현들로 무엇을 상징하고 가리키고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 표현들은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예수의 희생과 피를 비롯하여 그 모두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릴 때 발휘하던 힘,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를 앉히신 힘, 정사(principality)ㆍ정권(rule)ㆍ권세(authority), 능력(power)ㆍ주권(dominion) 위에 있는 뛰어난 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힘(엡 1:20)이라고 한다.
이 힘이 예수의 피와 희생의 발원이라면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은 이 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듣는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은 무엇인가? 그 힘이 임재하면 나도 예수와 피와 희생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가? 그 힘이 임재하면 나도 예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들려주는 메신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나에게 그 힘이 있어야 하겠고 그 힘이 임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언제 어떻게 임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그런데 그 방법은 거꾸로가 아닐까? 그 힘이 먼저 임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 사건과 능력이 임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과 능력이 바울에게 임했으므로 에베소서 1장을 쓰고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조직을 운영하는 목회 서신을 보내게 된 게 아닌가!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이 알기를 바랐던 하나님의 강한 힘과 능력(엡 1:19)이 나에게 임하는 일이 최우선이고 대망의 숙원이 되어야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는 자에게 주고 마는 자에게 주지 않는 그분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예수의 희생과 피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눈으로 보고 믿는 일, 그것이 구속이요 죄 용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충만이다.
에베소서 2장 묵상
이러한 사건이 바울을 비롯하여 에베소 성도 모두들에게 일어났다. 이것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은 구원(엡 2:8)이다. 그런데 그런 어떤 믿음이고 그 믿음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일단 역으로 계산해보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삶을 살았다는 아는 일(엡 2:1),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산 일을 깨닫는 것,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를 따라서 살았다고 고백하는 일, 불순종하는 자식들 가운데 작용하는 영을 따라 생활했다는 것을 아는 일(엡 2:2), 육신의 정욕, 육신의 욕망과 사고를 따르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을 행했다고 자백하는 일(엡 2:3) 등이다. 이렇게 죄로 죽은 우리 또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일을 보고 아는 것이 하나님의 믿음이고 은혜고 구원이고 선물이고 작품이다(엡 2:5, 8, 10).
또 외인으로서 하나님을 모르고 지내다가 하나님에게 가까워진 사실을 아는 것이다(엡 2:13).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적 벽이 없어졌고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엡 2:14).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된 것이라는 것과 악한 일, 악한 마음으로 원수된 상태로부터 해방하고 화해케 된 것을 아는 것이다(엡 2:16). 화해와 하나됨과 평화가 이 땅에 임해서 누려질 수 있도록 한 것이야말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가 이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래는 원수간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가 되어 가족이요 한몸, 한시민, 한민족, 한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난 인류요 새인간성이다. 이것이 가지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함의는 실로 그 당시의 현실 세계를 곰곰이 숙고할 때 혁명적 성격의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체제 위협적 발언으로 낙인 찍힐 위험성이 매우 높았으므로 숨겼지만 그런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저의가 나에게는 읽힌다. 2장은 로마 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새로운 대항 제국을 건설하는 발기문이나 성명서 또는 초안ㆍ초석(엡 2:20)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에베소서 3장 묵상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제ㆍ경륜의 비밀은 현실 세계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자유와 해방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탈출, 미래의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제ㆍ경륜사의 반복적인 구조이므로 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현실 세계에 저항하는 공동체 또는 공동체적 세력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비밀(엡 3:4)은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이 모통잇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가 되어 영원전부터의 비밀(엡 3:9)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알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나 바울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고 환난을 마다하지 않는다(엡 3:12-13).
이 뜻을 세상 사람들과 통치자에게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이다. 따라서 전도와 선교는 현행 체제와의 싸움이고 대결이며 갱생이요 회복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이라고 말하면서 의도한 것이었지 않았을까? 너무나 지나친 주관적인 이해요 해석이겠는가? 이러한 전도와 선교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갖가지 지혜들이 알려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찬양으로 고백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을 섬기는(엡 3:7) 과정에서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지고(엡 3:16)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엡 3:18)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며(엡 3:19)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엡 3:20)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저항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견디게 하는 원천이요 또 교회가 그 보호막이 되어야 하는 존재 이유가 아닌가?
에베소서 4장 묵상
우리는 에베소서 3장 묵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제의 논리는 로마 제국의 복음과 이데올로기를 고려하는 가운데서 대비적으로 또는 대칭적으로 비추어져야 한다는 점을 간략히 언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로마제국의 복음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로마 제국의 평화를 대조시키는 가운데서 에베소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사실 바울은 그런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또 모르고 관심도 없는 채로 살았다고 볼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바울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배울 필요도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다. 바울의 신학과 신앙이 그 영역에 머물거나 갇혀 있다면 나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며 그의 각종 서신을 쓰레기 통에 버려버릴 것이다. 바울의 식견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면, 아마도 그것은 아무런 사회 의식이나 역사 의식이 없는 서민으로서 사적 행복을 추구해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고 진리를 그 시대의 그 공간에서 실천하고자 한 치열한 전사로서의 의미와 가치는 소실될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치열한 삶을 본받고자 한다면, 어쩌면 이 점에서는 예수보다 더한 것일 수도 있는 이 열정과 치열함을 살지 않는다면 예수인으로서의 삶을 산다고도 볼 수 없을 것 같다. 국정원장이 여당과 보수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 대선에 개입하고 박그네 대선 선거총괄본부장 김무성이 박그네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국가 비밀 기록물을 불법 입수해서 선거 운동에 이용하는 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국기 문란 행동이 자행되는 국내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추구하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고 예배하고 전도만 하고 있을 때 과연 예수와 바울은 뭐라고 반응할 것인가? 이런 일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너희들은 잘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우리에게 바울처럼 그 현실과 치열하게 대면하고 대결할 것을 명하지 않는가? 보수 여권의 지배적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서 예수의 복음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 땅에 구현하는 전사로서 살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현존하는 권력과 체제의 거짓말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있지도 않은 NLL 포기를 기만적으로 선포하고 NLL을 여야가 사수할 것을 공동 선언하자는 여당 대표의 뜨악한 발상은 분명히 사탄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인으로서 이런 정치적 현안에 개입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정교분리의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교육받은 탓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일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서 지금은 지나가지만 결국 나중에는 자기일로 되돌아온다. 관망하는 자세도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봤자 변화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욕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인이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고 입장을 표명하며 국정원장을 처벌하고 부정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니 부정 선거의 진상을 밝히고 박그네가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히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심지어 하야까지 가야 한다는 성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그런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부르심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가? 부르심은 특정 사역에의 소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실 여기서 부르심은 특정 사역에 종사할 것을 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인으로서 살아감에 있이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처럼, 바울처럼 살아가라는 소명이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을 협소하고 편향되게 이해하고 교육하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우리는 이러한 의미의 부르심을 빛내고 더욱 영광스럽게 하자. 바울은 예수 활동가ㆍ운동가로서 평생을 로마 제국의 당대와 현실 속에서 예수의 복음ㆍ평화ㆍ죽음ㆍ의를 깊이 체득하면서, 로마 제국의 복음ㆍ평화ㆍ정의ㆍ전쟁ㆍ폭력을 내면 속 깊이 의식하고 이에 대립각을 세우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전파하고 실천하며 조직을 세우고 대안 사회를 형성하고자 살아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목회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회의 지향점을 새로이 규정하고 정립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삶을 위해 그리고 지속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바울은 4장과 5장과 6장에서 우리에게 전해준다. 4장에서 그가 명하는 행동 강령은 이렇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내면화할 새로운 습성과 습속(habitus)과 삶의 방식이 그렇다.
1.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
2.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3. 우리는 겸손과 온유로써 서로 깍듯이 대해야 한다.
4.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써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해야 한다.
5. 우리는 서로를 평화의 띠로 묶고 하나 되게 한 것을 지켜야 한다.
6. 우리는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되게 통일해야 한다.
7. 우리는 주도 한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 되게 해야 한다.
8.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고 모든 것 안에 계시게 해야 한다.
9.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누어 주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선물의 분량을 나누어 주시게 해야 한다.
10.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어떤 사람을 사도로 어떤 사람을 예언자로 어떤 사람을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을 목자와 교사로 삼게 해야 한다.
11. 우리는 이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해야 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13.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아이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14.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속임수, 간교한 술수, 세상의 풍조에 떠밀려 다녀서는 안 된다.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성장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16. 우리는 각자 맡은 분량대로 활동해서 몸의 각 마디를 연결하고 결합하며 몸을 건설해야 한다.
17.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방 사람처럼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18. 우리는 이제 이 이상 이방 사람처럼 무지와 완고함과 어두움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
19.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방 사람처럼 수치와 방탕과 탐욕과 불결과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20.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서 그런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21. 우리는 예수의 진리와 가르침을 아는 자로서 과거의 생활 방식과 욕망과 부패의 옛 사람 및 옛 습속을 모두 벗어야 한다.
22. 우리는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해야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거룩의 새 사람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23. 우리는 거짓을 버려야 하고 이웃과 더불어 참말을 나누고 해야 한다.
24. 우리는 화를 내어도 죄를 짓는 데까지는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25. 우리는 화를 내어도 하루가 지나도록까지 품어서는 안 된다.
26. 우리는 악마에게 틈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27. 우리는 하던 또는 하려고 하는 절도를 끝내고 거저가 아니라 수고해서 제 손으로 벌어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28. 우리는 제 손으로 벌이를 하고 할 수 있다면 궁핍한 사람과 나눔이 있도록 해야 한다.
29. 우리는 나쁜 말을 뱉지 말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주고 은혜를 끼치는 말을 시의적절하게 해야 한다.
30. 우리는 구속의 날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때까지 성령을 잘 모시고 성령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31. 우리는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과 악의를 깨끗이 내버려야 한다.
32. 우리는 서로 친절히 대해야 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 묵상
5장에서는 다음과 같다.
3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당연히 그런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34.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35. 우리는 음행, 부정 행위, 탐욕은 그 이름조차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36. 우리는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
37. 우리는 감사에 찬 말을 해야 한다.
38. 우리는 음행하는 자, 행실이 더러운 자, 탐욕을 부리는 자와 같이 그런 우상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39.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누구의 헛된 말에서 속어 넘어가서는 안 된다.
40. 우리는 헛된 말에 속아 넘어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지지 않도록 조신해야 한다.
41. 우리는 헛된 말로 속이는 사람들과 짝해서는 안 된다.
42. 우리는 전에는 어둠의 자식들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이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야 한다.
43. 우리는 모든 선과의와 진실이라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44. 우리는 주가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45.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해야 한다.
46. 우리는 그들이 몰래 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빛으로 폭로해야 한다.
47.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펴서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48. 우리는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껴 살아야 한다.
49. 우리는 세월을 아껴 살아야 하니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50. 우리는 술에 취해서 방탕해서는 안 된다.
51.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52. 우리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해야 한다.
53. 우리는 가슴으로 주에게 노래하며 찬송해야 한다.
54. 우리는 매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
55. 우리는 남편과 아내로서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해야 한다.
56. 우리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하기를 주에게 하듯이 해야 한다.
57.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의 머리인 것을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과 같이 해야 한다.
58. 우리는 아내로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59. 우리는 남편으로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주시어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60. 우리는 남편으로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61. 우리는 남편으로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62. 우리는 남편과 아내로서 각각 그리스도가 교회를 먹이고 돌보는 것처럼 자기 몸[배우자]을 먹이고 돌보아야 한다.
63. 우리는 남편과 아내로서 부모를 떠나 각각 합하여 한 몸이다.
64. 우리는 남편과 아내로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인 것처럼 한 몸이다.
65. 우리는 남편과 아내로서 각각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에베소서 6장 묵상
6장에서는 다음과 같다. 한 가지 참고 사항은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 관계를 거론하는 6장 1절에서 9절은 5장에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 의미와 맥락상 맞는 것 같고 이 점에서 에베소서의 전통적 장 구분은 수정되어야 한다.
66.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67.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
68. 우리는 아버지로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훈련과 훈계로 교육해야 한다.
69. 우리는 종으로서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주인에게 해야 한다.
70. 우리는 종으로서 눈가림으로 주인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처럼 진심으로 해야 하되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해야 한다.
71. 우리는 종으로서 사람에게 하듯이가 아니라 주에게 하듯이 전심으로 섬겨야 한다.
72. 우리는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전심으로 섬기는 것은 선한 일은 각각 주께서 보상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73. 우리는 주인으로서 종을 동일한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74. 우리는 주인으로서 종을 겁박해서는 안 된다.
75. 우리는 주인으로서 종을 겁박하지 않는 것은 주인 및 종의 주님이신 그분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76. 우리는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강해져야 한다.
77. 우리는 악마의 간계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 갑옷을 입어야 한다.
78.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통치자, 권세자, 어둠 세계의 지배자, 하늘 세계의 악령 세력을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
79. 우리는 악의 날(day of evil)에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다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 갑옷을 입어야 한다.
80. 우리는 전신 갑옷 즉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정의의 철갑판을 두르고 허리에는 진리의 탄대를 차고 발에는 평화 의 복음을 차비하고 왼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쥐어야 한다.
81. 우리는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갖가지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82. 우리는 입을 열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83. 우리는 인간적 굴레와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여전히 복음의 사신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84. 우리는 서로 지내는 형편과 하고 있는 일과 그 밖의 모든 사정을 알리고 공유해야 한다.
85.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축복해야 한다.
에베소서 묵상 종결
에베소서 전체를 로마제국의 복음과 이데올로기라는 상황을 감안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 사회와 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울의 노력으로 캡스톤(capstone)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신학적 정당성을 가진 해석이고 설득력이 있는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정공의 문제일 뿐 그렇게 허락할 수 없는 해석틀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를 예수의 죽음―예수의 죽음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당시의 비인간적인 식민 통치의 권력과 제도에 저항하기에는 힘이 부치는 자의 불가피한 체념과 포기와 무저항으로 읽힐 수 있거니와 그래서 그도 그런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었기에 자기 죽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면서 체포되어 자기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긴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겠는가?―과 가치를 이 땅에 새로운 인간다운 사회를 도래하기를 희망하는 자의 희생 제사라고 보면서 이를 초석 삼아 현대 한국 사회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제거하는 데 헌신하는 모든 예수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또 부단하게 저항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지탱하고 새로운 삶의 습속을 창조하기 위해 교회에서 거룩한 인격과 공동체성을 필수적으로 먼저 구비하기 원했던 바울의 85가지 강령과 권고를 제출한 목회서신으로 결론내리는 바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본질적인 것으로 강조하는 우리 교회 공동체도 먼저는 이 85가지 지침을 잘 내면화하고 체현하는 데 최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거룩한 인격의 사회적 진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 85가지의 권고가 바울 당시의 로마 제국 하의 이방 사람들에게 또는 유대인계 내지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단적으로 그것은 그 당시에 만연한 삶의 방식과 기술과 비견해 보면 혁명적인 생활 양식이었을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삶의 기술에도, 에피쿠루스의 삶의 기술에도 비견될 수 없는 단독적이고 독보적인 새로운 삶의 기예로 평가될 수 있다. 지금은 사회의 진보와 인권의 보편화로 큰 도전 또는 도발로 들리지 않을지 모르나 그 당시에는 결코 간단하고 단순한 말이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모임에도 사실은 이런 것이 필요하다. 우선은 사회적 진격의 강력한 욕구보다는 우리 내부의 인격적 변화가 선취되어야 한다. 이제 시작이지만 이 85가지가 거룩한 인격의 사회적 진격을 위해서 그리고 앞서 3장에서 우리가 제안한 의미의 전도와 선교활동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그리고 선취적으로 개개인이 갖추어야 할 내면적 영성 형성 또는 기초 전투력 형성 강령이라고 보고 당분간은 이 85가지를 코팅해서 가정마다 성육신하는 개인적 수양의 명심보감으로 여기고 살아내도록 하는 노력부터 기울이자. 우리 교회 공동체의 관계ㆍ가치ㆍ권력ㆍ조직의 변화를 바란다면 이 과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시작이 에베소서를 공동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작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