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처럼 묻고 하나님에게 극렬히 대항하자
말씀과 함께 5: 욥처럼 묻고 하나님에게 극렬히 대항하자 2012/10/11 목 류의근
[본문]
6:1욥이 대답하였다. 아, 내가 겪은 고난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 있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올릴 수 있다면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니 내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 풀이 있는데 나귀가 울겠느냐? 꼴이 있는데 소가 울겠느냐? 싱거운 음식을 양념도 치지 않고 먹을 수 있겠느냐? 달걀 흰자위를 무슨 맛으로 먹겠느냐? 그런 것들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냄새조차도 맡기가 싫다. 누가 내 소망을 이루어 줄까?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깨뜨려 주시면, 그것이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고 이렇게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도 그것이 오히려 내게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무슨 기력이 있어서 더 견뎌 내겠으며 얼마나 더 살겠다고 더 버텨내겠는가? 내 기력이 돌의 기력이라도 되느냐? 내 몸이 놋쇠라도 되느냐? 나를 도와줄 이도 없지 않으냐? 도움을 구하러 갈 곳도 없지 않으냐?(욥 6:1-13)
[요약]
내가 겪은 고난은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워서 앞서와 같이 거칠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울부짖음은 풀이 없는 나귀의 울음이나 꼴이 없는 소의 울음 같은 것이 아니다. 나의 물음과 요구는 양념도 치지 않은 싱거운 음식이나 아무 맛도 없는 달걀 흰자위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안 된다면 하나님은 나의 물음과 요구를 부수고 깨뜨려야 한다. 차라리 그런 답이라도 주시면 나의 고통은 고통도 아닐 것이고 오히려 더 편안할 것이다. 나의 무지비한 고통은 나의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거듭 맹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런 나도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아무런 기력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 나를 도와줄 이도 없고 도움을 청하러 갈 곳도 없다.
[성찰]
이렇듯 욥의 물음과 소원은 너무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나귀나 소가 먹이가 없어서 우는 정도의 것이 단연코 아니다. 그것은 싱거운 음식을 먹을 때의 역겨움 정도의 것이 결단코 아니다. 정녕 답을 주지 않으시려거든 나의 물음과 요구를 부수고 깨뜨리시든지 해야 하는 정도의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욥의 절망과 탄식의 극한이요 극단의 표현이다. 하물며 그것이 동료 신학자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정통 신학과 같은 수준과 차원의 것일 수가 있으랴! 절대로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이 욥기 후반부에 가서 평결한 바 있다. 욥의 그것은 그 치열성과 극렬함에 있어서 어떤 조직이나 개인보다 치사 수준이고 창조주 하나님 대해서 목숨을 걸고 제기하는 혹독하고 맹독적인 질문이요 도전이요 저항이다. 욥은 겉으로는 점잖게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표현하지만 하나님에게 나의 질문에 답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며 압박하고 있다. 더 이상 버틸 기력도 없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답하라라고 욥은 처절하게 외치고 있다.
[실천]
욥은 실존주의자이다. 또한 신학자이다. 그의 실존적 물음은 실존철학적이기도 하지만 역시 근본에 있어서 신학적이요 신앙적이다. 이런 신학과 신앙을 보았는가? 내가 지적으로 알고 있는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가 있지만 그 수위와 심각성이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듯싶다. 그런 죽음의 고통과 절망을 겪으면서 제기하는 강렬하고도 처참한 질문이요 저항이기 때문에 건성으로 의례적으로 답할 수 없다. 또한 답해도 안 된다. 하나님조차도 욥의 질문과 요구를 부수고 깨뜨리지 못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변증론적으로 신정론적으로 조직 신학적으로 변론해서는 안 된다. 그런 답은 욥에게 사치스럽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본문은 보여준다. 또 욥은 욥기 전체에 걸쳐서 그런 답을 수용도 시인도 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욥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흔히 전통적으로 정통적으로 해석되는 욥기 42:5-6(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을 따르지 않는다. 나의 해석은 월터 브루그만(구약의 위대한 기도 참조)의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욥기는 욥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 답도 주어지지 않았고 욥의 질문은 여전히 하나님을 괴롭히는 유효한 질문으로 살아 있고 미결 과제로 남아 있다. 설령 정통적 해석에 따라 문제의 본문이 답으로 주어졌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욥의 질문에 하나님이 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답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역시 하나님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다만 나는 욥은 자기가 처음에 제기한 질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이 부수고 깨뜨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이러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견지하면서 하나님과 끝까지 철저하게 대결 의식을 가지고 저항과 당당함으로 답할 것을 요구하는 논쟁의 기도를 배우고 싶다. 우리는 대다수가 너무나 저자세로 알아서 기는 기도를 드린다.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옳고 선한 일을 할 때 특히 공공선을 추구할 때 공공선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주지 않는 데 대한 격렬한 질문과 도전을 무자비하게 욥처럼 그분에게 던지기로 작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