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프리즘

윤석열 대통령 탄핵의 정국 속에서

sonjengho 2025. 6. 1. 14:44

[이 글은 한국아나키즘학회와 허유 하기락 박사 기념사업회 공동 주관 4월 학술 세미나에서 공유된 원고로서, 발표 후 가필한 최종본입니다. 각주를 포함한 전문을 보려면 첨부한 파일을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와 자주인과 아나키즘(학회발표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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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자주인과 아나키즘: 탄핵 정국 속에서

 

전 신라대 교수 류의근

 

2025.12.3의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탄핵 심판과 내란죄 수사 보도과정을 듣고 보면서 나의 눈에 들어오는 가장 비통한 현실은 대통령 탄핵을 비롯해서 이에 연루된 고위 공직자들이 권력의 힘에 철저하게 식민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진실로 그들은 대통령 권력의 권위와 힘 앞에 어떠한 이의와 저항도 할 줄 모르는 충성 정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의 지배 앞에서는 노예상태에 있는 존재와 다름없었다. 그들은 최고 권력자가 주는 시혜와 인심을 뿌리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기존의 관습과 규범이 주는 편안과 안락의 테두리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변화의 문턱 앞에서 성인이 될 수 있는 통과 의례에 실패했다.

아마도 그중에서 대통령이 가장 권력 정치에 중독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전쟁 폭력을 행사한 것이니 말이다. 대통령이 국가권력을 국민생명보다 더 중히 여기는 지적 발육부전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극단적으로 말해 그는 국민을 적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람들은 그를 어설픈 근육질의 정치권력자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헌법을 국민 통제 도구로 여기는 그가 헌법이 국민 일반 의지의 통치 장치로서 대통령이 복종해야 하는 권위라는 것을 알기나 알까? 이래서 그의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는다.”(시편 12:8)

대통령의 통치주권이라는 표현은 오어법적(誤語法的)이고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 관념이다. 대통령은 군주나 제왕이 아니다. 그는 통치자가 아니다. 통치는 국민이 한다. 오히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이요 군주이다. 이것이 민주사회에서 국민이 통치한다는 말의 근본 의미이다. 민주사회에서 통치자는 국민이지 국가가 아니다. 국가권력과 국가주권과 국가폭력의 주는 국민이다. 이것이 민이 주가 되는 민주주의의 근원적인 본질적 뉘앙스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에 국민이 가지는 권력은 신성하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이 민주 정치의 본질을 잊어버린 채 사고와 사지가 마비된 좀비처럼 국정에 임했다. 그들은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무사유 존재자사유 불능 존재자들이었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 점에서 소박했다. 진실로 그들이 사유할 줄 아는 힘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겠는가? 유대인 학살의 실무총책을 맡은 아이히만이 최고 권력자가 내리는 명령만 수행했지 사고는 멈추어져 있었던 존재라는 아렌트의 믿음이야말로 사유 불능 현상의 또 다른 예일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사유할 줄 안다. 그들은 영리하게 사유하고 비범하게 판단한다. 결코 판단이 부재한 엘리트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다. 그들의 악은 평범하지 않고 비범하다. 그들은 베버가 말하는 이론적 합리성, 형식적 합리성, 실천적 합리성, 실질적 합리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핵심 문제는 그들이 사회의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회적 합리성의 수준에 대한 자기 관찰과 자기 객관화를 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합리성 수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회의 합리성 전체 수준에 퇴화를 가져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계엄령은 계몽령이 아니라 몽매령이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고위 관료계급정치계급사법귀족 계급은 그동안 누려온 권력에 의해 주어지는 단맛과 특혜를 누려왔고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의 정신과 사고는 극히 식민지화되어 있다. 그들 정신의 식민화는 그들이 위계적인 권력 정치의 하수인이 된 이유이다. 그들이 국민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할 줄 모르는 연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겪고 있는 이 중차대한 위기 현실에서 그들의 사고와 판단과 행동은 오랫동안 그들을 달래고 길들이고 안락을 보장한 권력 정치의 명령과 복종의 지배 메커니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복귀한 총리는 여야 합의를 빌미로 여전히 헌재의 위헌 판결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헌법재판관 후보자 마은혁 임명을 묵살하고 있다. 이는 여야의 동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명분하에서이지만 사실은 탄핵 인용의 위험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형배, 이미선 재판관의 후임으로 윤석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을 지명할 때 동시적으로 마은혁 임명을 실행했지만 이 또한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기회주의적 결정이다. 그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꾀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권력 정치의 시혜 속에 살아가는 식민지 관료형 공직자의 잔꾀인 것이다. 이 잔꾀 앞에 최고 관료의 원칙과 의무는 권력자의 이익에 부역하는 것이다. 한 권한대행은 나중에 재판관 지명을 지명 아닌 의사 발표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언어 마술이다.

탄핵을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정당정치를 통해 국민을 위해 실현할 이념적 가치라도 가지고 있는가. 오로지 개인의 사적 손익가치뿐이다. 자신이 누려온 권력과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계산에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안쓰럽다 못해 혐오스럽다. 이들의 탄핵 반대 지지 활동과 언어적 수사들은 대중영합주의적 정치의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이토록 책임 정치를 배반한 적도 없을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여당의 정당정치는 대통령의 사유화된 집단 활동으로 전락했고 모든 것이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 왔다갔다할 뿐인 개인별 사적 이익 추구 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법 귀족 역시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는 법조문 해석도 순식간에 뒤바뀐다. 검찰 총수 역시 최고 권력자 앞에서는 구속 기간 산정을 날로 하는 법조항을 헌신짝 같이 내친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곧장 부하 검사들에게는 시간으로 하지 말고 이전처럼 날로 계산하라고 복종을 명한다.

이 모든 것이 권력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지배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들이 유능하고 실력은 있으나 사유 불능의 못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존 권력과 그 질서의 경계선을 넘는 것을 두려워해서 아니, 할 수가 없어서 그 경계선상에서 죽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이 보수주의 정신이 반동적인 힘이 승리하는 삶을 가져다주는 이유이다. 보수주의 정신은 기존의 지배적 질서와 권력 앞에서 낙타처럼 무릎을 꿇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보수주의 정신이 초극되어야 할 가치의식이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니체는 이러한 삶의 인간을 낙타형 인간이라고 불렀다. 낙타형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면서 자신은 승리하는 자들이다. 반동적인 힘이 승리하면 니체가 말하는 최후 인간(Letzter Mensch) 즉 말인(末人)은 증가하게 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초인(超人)의 삶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탄핵 정국에서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다.

말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에서 공론의 장을 조작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제조한다. 이들은 위기 상황에서 발생하는 공백이나 경계 공간을 이용해서 사기, 기만, 술수, 꼼수, 궤계, 궤변, 강변, 위선, 교란 등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이들은 사이 공간, 혼성 공간에서 언어의 의미의 산포를 교활하게 사용한다. 이들은 갖가지 기만적, 교란적 수사를 퍼트린다. 우리는 탄핵 변론 법정에서 최고 권력자와 최고위 공직자가 짜고 치는 희대의 사기 질답을 주고받는 것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보았다. 그들은 거짓과 궤변으로 속임수를 연출하고 연기한다. 그들은 속임수를 쓰는 자, 즉 트릭스터(trickster)이다. 자신의 비열함과 무책임을 분식하는 속임질이 뻔뻔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사기한(詐欺漢)이다. “그들은 혀는 우리의 힘, 입술은 우리의 재산, 누가 우리를 이기리요라고 말한다.(시편 12:4)

이 트릭스트들의 사기술은 기막히고 신박하다. 이 트릭스터들은 기만적인 위장술을 통해 국회의원을 끄집어내라호수 위의 달그림자를 쫓아가는 느낌으로 교란시키고 의원요인으로 둔갑시킨다. 이들은 자기기만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허언과 위언을 국민들 앞에서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버젓이 서슴없이 내던진다. 참으로 오만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다. 자신들의 살 길 앞에서 전 국민을 바보로, 노비로 만든다.

현 상황에서 소위 한국 사회의 특권층 지배 엘리트들은 또 어떤가? 이들은 12.3계엄 이후에 펼친 곡학아세의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행태와 내면세계를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계엄령이 계몽령이라면 바로 그 점에서 그렇다. 국민들은 한국 지배 엘리트들의 민낯을 너무 몰랐다. 그런데 이번 계엄 사태로 그들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얼굴이 부패해 있음이 명명백백하게 상영되었다. 이것은 매우 큰 소득이고 큰 선물이다. 그것은 독일의 홀로코스트와는 비교불가의 것이지만 어쩌면 그 본질에서 국가조직 관료들의 권력 예속적 사고구조와 관료제적 기구와 행동의 악한 합리성과는 상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를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남겼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 발전을 위한 치명적인 의제이다.

이러한 현재적 한국 상황에서 오늘의 학술대회 주제인 자주인”(self-master)의 개념만큼 가치 있고 시의적절한 의미심장한 말은 없을 것이다. 2025.12.3의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와 탄핵의 사태에서 특정 지배 엘리트층이 보여준 권력 정치에 대한 안일한 순응과 무기력한 사고와 판단은 자주 또는 자주인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가를 실증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이 국민을 위해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자주인일 것이다. 남의 지배와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주권과 자율성을 속박 없이 발휘하는 자유인 말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에서 국민들을 오도하는 정치계급관료계급검찰계급사법계급에 속하는 특정 지배 권력자의 발언과 행실로부터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배우고 학습할 것이 있다면 자주인이 되라일 것이다.

이러한 자주인자유인은 아나키즘이 흠모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오늘의 학술 대회 주제 즉 자주인과 아나키즘논찬을 통해서 우리는 특정 지배 권력과 일반 권력 정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을 마다하지 않는 심력에 용기를 불어넣고 자양분을 공급받기를 원한다. 이론적 토론만이 아니라 토착적실제적실용적 실천이 필요하다. 아나키즘이 원하는 실천적 자주인자유인은 2000년 전에 예수가 그 본을 보여주었다. 알다시피 예수는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심문할 때 자신이 주 또는 주인임을 밝혔다. 빌라도와 예수의 심문 과정을 잠시 상기해 보자.

 

빌라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 네가 하는 생각이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이냐?[네가 스스로 네 주인인지 아닌지를 네 권위를 가지고 말해보라]

빌라도: 너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에게 넘겼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예수: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권력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빌라도: 그러면 너는 왕이 아니냐?

예수: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이를 위해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다.[진리를 알면 너는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

빌라도: 진리가 뭔데?[냉소적으로 반문하고 있다]

예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이 말은 사회변혁적 반체제성 을 에두르는 완곡어법이기 때문에 그 직설적 의미를 대놓고 말했다면 예수만이 아 니라 제자들까지도 즉결처분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빌라도: 묵비권이냐? 나는 너를 놓아줄 권한도 있고 처형할 권한도 있다.[나는 너를 지배한 다, 즉 나는 너의 주인이다]

예수: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를 처분할 권리가 없다.[너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즉 나의 주는 따로 있다]

 

메노나이트 계열의 신학자 버나드 엘러(Bernar Eller)는 이러한 예수를 아나키스트로 규정하고 그가 절대적 자주인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 속한다[나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지배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어떠한 충성도 빚을 지고 있지 않다.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주장하는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유롭다.”

 

우리는 작금,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평의에서 이렇듯 권력의 지배와 질서에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자유롭게 행사하는 인간의 탄생을 보고 싶다. 이미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지배 권력자들은 진리를 알고 싶지도 않고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줄 진리에 관심도 없다. 그들은 오로지 기존 권력의 질서와 권위에 복종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국민들은 진리를 알고 싶고 진리로 자유롭게 되고 싶어 한다. 탄핵 과정에서 국민들은 사법적 정치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진리이고 진리를 따르는 길임을 알고 있다. 이 진리가 막힐 때 국민들은 어둠에 빠지고 또다시 비상계엄 이상 가는 참담한 트라우마를 겪을 것이다.

예수는 역대 제국들의 유대 민족 억압 역사로 인한 무질서와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다시 말하자면, 진리를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자 이 땅에 왔다. 그것은 어떤 권위와 권력과 지배와 질서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자유로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어놓으며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이다. 그것은 기존 질서에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고 권력 정치의 힘과 권위에 맥을 못 추는 눈먼 사람들을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풀려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이고 진리에 의해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은폐에서 탈은폐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즉 동굴의 어둠에서 밖으로 나와 태양의 빛을 보면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삶과 실천이 자유의 증명이다.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빛, 즉 진리이고 자유인임을 입증했다.

그리하여 예수가 자신의 자유와 권위로 권력의 질서와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대항함으로써 권력자의 지배적 질서를 타파하고 모든 이가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유롭게 평등을 누리는 자주공동체를 지향한 것처럼, 우리도 현재의 탄핵 정국의 터널 속에서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이 자기 주인으로서 지배하고 다스리는, 나와 남의 자유와 평등을 차별하지 않는 자주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아마도 나와 너의 지배가 없고 나와 너의 자유와 평등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해방의 자율공동체는 인류의 영원한 유토피아적 갈망일 것이다. 그리고 이 유토피아는 아무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아무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정치적 청사진으로서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와 같은 위대한 제국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 사회주의 제국이 해체되고 자본주의 최강 제국 미국이 현존하는 지금에도 거대 서사로 성경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상을 기억하며 준행하는 사제들이 나사로처럼 식민에 죽어 있다가 예수의 말을 듣고 무덤에서 일어나 날마다 부활의 삶을 사 는 작금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제 마감하면서 예수를, 우리를 자주인으로 인도하고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로 표현하는 시 한 편을 첨부한다.

 

그리스도 능력

 

그를 보라!

그의 신성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의 자유를 보라.

그의 능력에 대해 부풀린 이야기를 보지 말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그의 무한한 능력을 보라.

그를 에워싼 1세기 신화를 보지 말고,

오히려 그의 존재의 용기, 그의 삶의 능력 그리고 그의 사랑의 감화력을 보라.

당신은 광신적 탐구를 중단하라!

잠잠하고 이것이 하나님임을 알라.

이 사랑,

이 자유,

이 생명,

이 존재,

그리고

당신이 받아들여질 때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라.

당신이 용서받을 때 당신 자신을 용서하라.

당신이 사랑받을 때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그 그리스도 능력을 붙잡으라.

그리고 담대하게 당신 자신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