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자아철학, 류의근 편, 교육과학사, 2023
❙총서 간행사❙
대한철학회는 1963년 11월 9일 한국칸트학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여, 1965년에 한국철학연구회로 개칭하였다가 1983년에 다시 대한철학회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3년은 대한철학회가 창립된 지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학회 학술지 철학연구는 2023년 5월 31일 자로 166집을 간행하였으며, 현재 한국의 철학 학술지로는 가장 많은 지령을 보유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우수한 연구자들이 철학연구를 통해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는데, 무려 2,500편이 넘는 논문들이 소개되었다.
본 학회는 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학술연구총서 발간을 기획하게 되었다. 학회 임원들과 법인 이사회에서 이번 기회를 맞아 학회지에 발표된 연구 결과물을 학계와 사회에 보다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식과 정보 공유의 과정이 점점 더 간편해지고 요약화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학회지에 게재된 연구 성과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단행본의 형태로 지식인 사회에 제공하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적 창조 활동이다. 모쪼록 이 총서가 발간 취지에 부응하여 한국철학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한국 사회의 새로운 미래 형성에도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총 8권의 총서를 기획하였다. 우선 동양과 서양철학 분야를 각각 세 주제별로 분류하여 총 6권의 도서를 발행한다. ‘동서철학사상의 수용과 탈식민철학의 가능성’, ‘자아철학’, ‘환경생태철학’이라는 특색 있는 세 가지 주제를 선택하였다. 이 외에, 초창기 본 학회의 중심 연구주제였던 칸트철학 관련 연구서 1권, 그리고 우리나라 철학계의 선구자적 인물이자 본 학회 창립의 주역인 하기락 선생 관련 연구서 1권을 별도로 출간한다. 분야별로 편집 책임자를 지정하였는데, 김상현(동양철학), 류의근(서양철학), 이남원(칸트철학), 이재성(하기락철학) 네 분 선생님께서 많은 수고를 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우선 편집자 선생님들께 학회를 대표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 특히 철학 분야의 학문 여건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대학에서 수많은 학과가 사라지고 있으며, 관련 교양과목들조차 대폭 축소되거나 아예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학문 후속세대의 성장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철학회의 운영 여건 또한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대한철학회는 명실공히 한국의 철학계를 대표하는 학회의 하나로서 그간 우리 사회에서 많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전통이 앞으로도 계승되어 뿌리 깊은 나무로 자라가고 더욱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이번 총서의 간행사업 또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총서 간행을 위해 실무팀 책임자 역할을 기꺼이 맡아주신 이상형 선생님, 이재현 선생님 두 분과 팀원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상업성이 크지 않은 전문 서적을 출판해주신 교육과학사와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3년 9월
대한철학회장 장윤수
편집자 서문
본 책은 대한철학회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되었다. 즉 대한철학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자 기획된 학술 프로젝트라는 뜻이다. 이 뜻깊은 학술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철
학회6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기념사업위원회는 60년 동안 출판해 온 연구논문들을 학계
에만 공유하지 않고 사회에 널리 알리기로 결정하였다.
대한철학회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2500편가량의 논문들을 네 분야로 구분했고 분야별로 편집 책임자를 지정하였다. 서양철학 분야는 신라대 류의근 교수, 동양철학 분야는 울산대 김상현 교수, 칸트철학 분야는 부산대 이남원 교수, 하기락철학 분야는 계명대 이재성 교수이다.
서양철학 분야를 담당한 본 편집자는 논문 선정의 준거를 거칠게나마 “사회 속 철학과 철학 속 사회”라는 주제에다 두었다.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철학은 사회 속에서 철학하고 사회를 철학하지 않는 철학은 사변과 논리 연습과 고상한 학문 놀음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어떤 지성사가는 미국철학회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사회적 참여가 모자랐다는 점을 유의미하게 지적한 바 있다. 기회가 있다면 대한철학회는 어땠는지를 추적하는 과제는 대한철학회의 역사에서 배울 교훈과 반성을 가져다줄 것이고 또한 그 과제는 학회의 앞날이 어떨지를 추단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철학 창달과 이론이 제아무리 신박한 것이라 해도 사회 현실의 실제 모습이 최후의 발언권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세계철학의 혁명가였던 하이데거의 정치 참여가 붕괴한 것도 독일 민족의 나치 현실에 의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독일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러시아 정치 참여 철학자 두긴에게도 현존재는 러시아였듯이, 우리의 현존재 역시 한국 사회요 한민족일 것이다.
본 편집자는 앞서 말한 준거에서 서양철학 분야의 논문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우선 제1권은 거시 통사적 관점에서 서양철학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수용되고 발전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우리 사회의 철학의 주체성과 보편성을 담은 논문으로 구성했다. 바꾸어 말하면 서양철학을 지역화하고 한국철학을 세방화하는 논문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른바 한국서양철학의 세방화의 문제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러자면 일단 서양철학의 수용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역사도 철학도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유럽사 아닌 지구사, 유럽사의 지방화, 유럽철학의 지역화, 제3세계 철학의 세계화가 진행 중에 있고 앞으로 철학도 다편적ㆍ다자적ㆍ다원적ㆍ다극적이 될 것이고 이미 그런 상황이 되었다. 북반구 철학의 헤게모니는 만만하지 않겠지만 남반구의 철학의 진격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탈식민철학의 가능성과 잠재력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서양철학 분야 제1권은 그 제목이 서양철학의 수용과 탈식민철학의 가능성이다.
제1권에 실린 논문은 총 24편이다. 그중 총론에 해당하는 1부 서양철학의 세방화의 문제에 편성된 논문은 3편이다. 이 3편은 각각 유럽을 지방화하는 현재의 국제적 추세를 보여주는 연구를 대표하고 유럽의 지방화와 재보편화에 따르는 비판적 과제를 취급하며 앞으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전망의 거처를 제시한다.
제1권의 2부 서양철학의 수용사에는 11편이 실려 있다. 이것들은 모두 서양철학사상 매우 중대한 위상을 차지하는 다양한 사조를 우리나라가 어떻게 받아들였고 발전시켰는가를 통사적으로 보여준다. 니체철학은 일본과 러시아에서도 수용된 바 있는데 이를 다룬 논문이 있기에 비교수용사학의 관점에서 자료 가치를 고려하여 포함시켰다. 특별히 기록할 것은 남과 북의 철학관을 규명하는 논문을 실었고 대구경북지역의 서양철학 수용 실태를 연구한 논문을 다수 편집했다는 점이다.
제1권의 3부 탈식민철학의 가능성에서는 한국적 사회 토양에서 주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철학을 수립하는 철학적 사유 노력을 제시하려고 했고 한국에서 철학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또는 한국을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 시각에서 답론에 해당할 만한 논문을 예시하였다. 이러한 편성을 통해서 서양의 인식 제국, 철학 제국으로부터 한국철학이 탈식민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함의하거나 가시화하는 사유 노력을 담았다.
서양철학 분야 제2권과 제3권은 미시 주제적 관점에서 문제 중심별로 접근했고 초점을 맞춘 문제는 각각 인간과 세계였다. 근대 이후 신이 없는 세계에서 우주의 동축은 인간과 세계로 구축되었다. 인간은 이제 세속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자아-인간이고, 세계는 인류 사회에서 가장 화급한 쟁점이 된 지구-환경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제2권은 사회 속 행위자인 인간, 즉 자아의 개념에 집중했고 독일ㆍ영미ㆍ프랑스ㆍ한국에서 자아담론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규명하는 논문으로 구성했으며 이렇게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제2권은 그 제목이 서양의 자아철학이다.
서양의 자아철학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서양의 자아철학의 사회성과 역사성이다. 사회성과 역사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잠시 자아를 둘러보는 이유는 자아의 발견에 매몰되지 않고 자아담론의 사회-실천적 함의와 가치를 주시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1부는 현대의 자아담론을 살펴보기 전에 예비적 정지 작업으로서 근대의 자아철학의 두 사례를 선정했다.
2부, 3부, 4부, 5부는 각각 독일의 자아담론, 영미의 자아담론, 프랑스의 자아담론, 한국의 자아담론을 예시한다. 이러한 다양하고 다각적인 사례들이 우리만의 자아담론을 창달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과문한 탓이지만 아직까지는 세계철학 무대에서 자아에 대한 획기적이고도 창조적인 이론을 제시한 경우가 지극히 드물다. 국내의 대부분의 글들은 서양철학의 독창적인 자아 패러다임에 대한 논고나 주석이나 비평으로 머문다. 한국의 철학연구자들의 머리와 누적된 연구사로는 칸트, 헤겔을 위시한 현대 서구철학의 수많은 독창적인 자아이론에 비견될 수 있는 독자적이고 역사적인 자아론의 발견이나 발명은 요원한 과제일까. 5부 한국의 자아담론의 글들은 이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머지않아 자아철학의 분야에서도 철학의 역사를 장식하는 독보적인 한국적 자아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1부는 근대 자아의 대표적인 사례로 칸트와 헤겔의 자아철학을 사회성과 역사성 속에서 바라보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1장 “칸트의 주체 개념에 대한 반성적 고찰”은 칸트의 자아를 근대의 힘의 주체, 동일화의 주체에 대한 비판적 반성 과정에서 수립된 것이라고 본다. 칸트의 이론 이성, 실천 이론, 판단 이성은 주체의 실체화를 거부하는 자아론이고 ‘사이성으로서의 주체’라는 참신한 결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칸트적인 비판적 주체가 오늘날의 한국 사회, 역사, 문화, 종교에서 요구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2장 “헤겔철학에서 자아의 개체성과 보편성의 문제”는 헤겔의 의식이론에 의거해서 인류의 오랜 염원인 개체성과 보편성의 합일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개인의 보편성의 구현 문제는 근대 이후 정치사회철학의 화두였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진정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바꿀 수 있다. 주지하듯이 헤겔의 답은 개체성과 전체적 삶의 반성적 통일성이 실현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형형색색의 개체성을 지양하고 넘어서 우리로 나아가는 자아를 말한다. 나가 우리가 되고 우리가 나가 되는 의식 또는 자아를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나 또는 우리가 보편적 개체가 되는 것은 정신에서이다. 따라서 헤겔의 답은 자기의식이 보편성을 지닌 정신, 즉 보편정신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헤겔은 보편적 의무와 개체적인 본성, 마음의 덕성과 현실의 구체적 세계경영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불행한 의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개체성과 보편성의 양극에서 방황하는 불행한 의식을 극복하는 일이 인간이 보편성을 달성하는 문턱이다. 그것은 의식의 불행이나 죄 속에 사는 인간의 해방이요 구원이다.
불행한 의식은 금욕주의적 의식, 회의주의적 의식에 머물거나 공동선을 요구하는 덕의식의 실패와 역사적 현재와 현실의 승리, 보편성의식의 좌절, 양심의 가책과 수호 등을 겪으면서 마침내 우리가 수행하는 행동에 포함된 죄를 용서하는 단계로 발전하며 이 죄의 용서를 통해 개체성과 보편성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해진다. 이제 삶의 불행은 개체적 삶의 죄에 대한 용서로 구속(救贖)된다. 이렇게 정신에 아무런 상처도 흉터도 남기지 않는 자기의식의 단계가 절대의식, 절대지식, 절대정신이다. 이러한 무한한 의식과 지식에서 개체와 보편, 특수와 일반, 추상과 구체, 무한과 유한, 동일과 차이의 종합이 이루어지고 자기의식은 양극의 갈등과 투쟁이 종료되는 절대정신에서 완성된다.
헤겔의 변증법적 주체로서의 절대의식은 칸트의 비판적 주체로서의 선험적 의식과는 다르게 그러나 역시 전대미문의 신기원을 이루는 미증유의 의식의 경험의 역사, 의식의 발달의 단계와 구조에 관한 서술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근대의 독창적인 의식현상학이 아닐 수 없다.
2부는 독일의 자아담론이라는 제목하에 철학자 5명의 자아론을 논구한다. 먼저, 3장 키르케고르의 자아 개념이다. 3장은 키르케고르의 자아 개념을 규명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아관을 비판하는 데 적용한다. 현대인의 자아 상실의 근원이 죄의 문제에 있음을 지적한다. 아도르노, 레비나스, 푸코, 데리다의 자아철학을 짧게 요약하고 간명하게 비판한다.
4장은 니체의 계보학적 고찰에 의한 자아생성사를 통해 근대의 자아철학자 데카르트, 칸트의 주체 개념을 비판하고 또한 언어가 사유를 구속하는 점에 착안하여 주체의 기원을 언어의 형이상학적 분석을 통해 풀어서 해체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주체로서 신체 주체를 내세운다.
5장은 후설의 자아 개념을 알기 쉽게 자아와 세계의 상관성 구조에서 해명함으로써 영국 경험론의 현상론적 자아론의 한계를 밝히고 생활세계를 매개로 해서 자아의 현상학적 구조를 분석한다.
6장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적 현존재 분석을 통해 하이데거의 고유한 인간 존재론을 기초인간학이라고 표현한다. 하이데거의 기초인간학은 전통인간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현사실성에 기반해서 인간을 규정하는 인간학이다. 하이데거의 기초인간학을 통해서 하이데거의 인간 개념이 전통적인 인간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자세히 보여준다.
7장은 하르트만의 정신론에 관한 논고로서,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파악하고 정신적 존재를 객관화(Objektion)와 객체화(Objektivation)의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해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객관적 정신과 객체화한 정신의 관계를 규명한다. 여기서 정신은 헤겔이 말하는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그리고 딜타이가 말하는 정신적 세계나 역사 세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하르트만은 정신을 개인적 정신, 객관적 정신, 객체화한 정신으로 나누고 이 세 가지 정신의 존재 형식 간의 상호관계를 존재론적으로 해명한다.
8장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간론을 다룬다. 전통적으로 인간이 정신과 육체로 나뉘어 규명되어 왔던 것과는 다르게 슈타이너는 몸, 혼, 영의 삼분설에 입각해서 인간을 규정한다. 또한 자아와 정신을 육체 및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상호작용과 발달로 이해한다. 이러한 인지학적 인간관은 영혼의 변화와 치유를 추구하는 교육철학과 연결되어 발도르프학교의 교과과정에 적용된다.
슈타이너는 위의 잘 알려진 철학자들과는 달리 약간 생소한 철학자이기에 배경 지식으로 잠시 소개한다.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는 인간을 정신 또는 영의 존재로 보고 영적 경험이나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영적 과학자인데, 영계를 자연과학적 관찰처럼 인간의 초감각적 세계 인식능력으로서의 상상⋅영감⋅직관을 통해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뜻에서 자신의 인간학을 정신과학이라고 생각했다.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은 딜타이의 삶의 체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정신과학이나 브렌타노의 기술심리학에 기초한 정신과학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이나 영성을 신비주의적으로 또는 비의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는 영적 과학 운동이었다. 슈타이너는 칸트의 비판적 인식론을 비판하는 관점을 정립한 후에 매우 고유하고 독특하며 비의적인 인간학을 전개했는데, 그는 자신의 인간철학을 인지학(Anthroposophy)이라고 불렀다. 유명한 발도르프학교는 그의 인지학적 인간철학을 토대로 설립되었다.
슈타이너는 빌헬름 딜타이, 프란츠 브렌타노,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 막스 셸러, 니콜라이 하르트만,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동시대 철학자였으며, 사회개혁자, 사회교육자, 영적 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영적 세계와 실재에 대한 풍성한 관찰과 기록은 대단하지만 그의 학문적 지위와 경력에 관한 한 대학사회와는 분리되어 고립된 삶을 살았다. 최근에 와서야 국내외적으로 슈타이너의 사상에 대해 철학, 신학, 의학, 교육 영역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8장에서 거론하고는 있지 않지만 슈타이너는 자신의 인지학적 인간론을 정신과학적 접근에 의한 탐구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정신과학적 접근은 철학, 신학, 기독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윤회설과 업설, 신지학, 신화적 사고 등이 혼종되어 있는 탐구였다.
3부는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최근에 논의된 자아에 관한 심리철학적 연구들을 담았다. 최근의 심리철학 분야에서 자아의 문제가 어떤 방향과 주제하에서 연구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특별히는 윤리 문제와 관련되어 자기동일성⋅인격동일성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음을 유의해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탐구들은 행동철학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아울러서 자연과학과 현상학의 만남을 구체화하는 주목할 만한 논문도 제시된다.
9장은 비트겐슈타인의 형이상학적 주관을 칸트의 선험적 주관과 대비해서 논의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자아가 칸트의 선험적 자아 해명에 언어분석이나 언어게임 차원에서 진보를 가져온 공적을 논술하고 이들의 자아가 주관과 객관을 포함하는 우주적 질서나 우주적 자아를 암시하고 있다고 보고 이러한 차원에서의 연구가 있어야 함을 제안한다.
10장은 개인적 자아와 공동체의 문제를 찰스 테일러와 헤겔을 통해서 공동체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서로를 비교해서 고찰한다.
11장은 자아의 동일성을 통합성(integrity)의 수준에서 접근하고 분석하는데, 이때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자아 통합성 개념에 의지하면서 통합적 자아를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12장은 자아(인격)의 통합성 문제에 대해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의 통합적 자아 견해를 따르면서도 자아(인격) 통합성을 둘러싼 가치 논쟁에 관한 다각적인 비판적 검토와 대안적 방향과 출구를 제시한다. 이 글은 통합적 자아를 직접적으로 논구하기보다는 통합적 자아 또는 자아 통합성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 대상인지를 해명하는 논의에 집중하고 있고 그 답은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말하면, 자아가 어떤 수준이나 차원에서든 일정한 형태로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 진리라면 인격 통합성이 가치가 있는지 하는 문제는 자명한 답이 나오게 되어 있을 것이고 다만 그 논변 또는 증명을 설득력 있게 구성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 아닌가 싶다.
13장은 놀랍게도 현상학적 자기의식의 지향성이 두뇌의 자기-참조적 지향성을 물리적 토대로 삼고 있음을 밝히고 뇌의 신경생물학적 구조가 자기의 형성 과정에 필수적임을 규명한다. 결론은 두뇌의 비의식적 지향성이 의식의 지향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식의 지향성의 가능 조건을 두뇌의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 경험적으로 설명한다.
4부는 라캉, 레비나스, 리쾨르, 들뢰즈, 윌버, 네그리와 하트 그리고 랑시에르의 자아담론을 다룬다. 14장은 라캉의 ‘오브제 a’, 즉 소타자의 개념과 현실 연관 구조를 해명하고 라캉의 정신분석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15장은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적 주체성을 존재자와 존재의 분리를 통해서 규명한다. 16장은 리쾨르의 해석학의 견지에서 프로이트의 의식과 자아를 재구성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서 해체된 자아의식을 새로이 정립하는 논의를 펼친다.
17장은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그러나 고래로 전해 내려온 의식의 변성 상태를 논의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인간 이하의 존재, 예컨대 말, 고래, 물고기와 같이 되는 의식 변성 상태에 관해 그 특징과 방법과 원리가 어떠한지를 들뢰즈와 가타리의 연구를 중심으로 탐구하고 인간이 이렇게 동물과 같은 특이한 신체적 상태로 된다는 것의 의미를 윌버의 의식수준 이론에 의거해서 영 또는 공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18장은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 구조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 주체로 소개하고, 이러한 다중의 계급적 주체성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새로운 정치적 실천 주체로 랑시에르의 인민을 고찰한다. 랑시에르의 인민 또는 민중은 현재의 의회주의적 민주체제의 지배 질서를 거부하고 현재 민주주의를 과두정으로 묘사할 수 있는 나쁜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며 이와의 단절을 실천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집단 또는 무리를 진정한 의미의 데모스라고 부른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라기보다는 불평등한 현실에서 자기 몫을 찾는 투쟁적 활동, 즉 전투적 실천이다. 그러고 나서 글쓴이는 이들의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고 미진한 대목을 소구함으로써 미래의 정치적 실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 과제를 시사한다.
5부는 한국적 상황을 고민하는 주체적인 자아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떤 주체가 와야 하는가에 대해 일별해 볼 가치가 있는 한국 철학자의 논의와 주장과 의제 그리고 믿음을 담은 논문을 다섯 편 실었다.
이상에서 편자는 책의 구성과 게재된 글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제 전체를 돌아보면서 실린 글들에 대한 소견을 적고자 한다. 편자는 1부에서 자아철학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환기하고자 칸트와 헤겔의 자아철학에 대한 두 교수의 논문을 인용했다. 이렇게 인용한 저의는 누구나가 이론적 관점과 입장은 다를 권리가 있고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론적 논의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의 정신적 생활세계가 식민화되지 않는 것임을 상기하고자 함이다. 우리 철학계의 대부분의 논의는 서구 철학 제국의 식민지적 생활세계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부 독일의 자아담론에서는 키르케고르, 니체, 후설, 하이데거, 하르트만, 슈타이너의 자아철학을 거론했다. 저마다의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글들이고 중후하고 저력이 있으며 만만치 않은 논술과 주장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라”라는 철학적 금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를 극복했다고 말해지는 하이데거조차도 데리다에 의하면 “정신”의 개념에 붙잡혀 있다고 비판받는 실정이다. 우리가 정신과 자아에서 탈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르트만이 존재층을 구분해서 정신의 객관화와 객체화를 구분했지만 이도 역시 정신의 세계를 다루는 일환일 뿐이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간이해는 또 다른 관념론적 극점이다. 니체 역시 정신이나 이성 대신 몸을 내세웠지만 니체식의 정신 해체는 허무주의적일 것이며 이로써 그 역시 정신에 머물지 않고는 미래의 초인을 실현할 수 없다. 최후의 인간으로서 보통 사람들, 즉 말인(last man)으로부터 초인(over man)으로 진화하는 것 역시 정신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예전의 자아는 가더라도 새로운 자아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자아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자아는 숱하게 나왔다. 내가 보기에, 이 수많은 자아가 시대의 아들로서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검토하는 자아철학이 나와야 한다. 자아철학의 다양성만으로는 안 되고 통합성과 보편성을 띤 자아철학, 그것도 시대에 충실하고 성실한, 투우와 같은 자아철학을 꿈꾸어본다.
이러한 의중에서 보면, 독일의 자아담론은 자아철학계열의 정통답게 자아에 충실하고 성실하지만, 시대에 충실하고 성실했는지 하는 문제는 가려져야 할 과제이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적⋅종교적 자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상황과 그 문제성을 올바르게 인지했는지는 의문스럽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성을 담아내기에는 여전히 구체제의 자아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부의 자기진정성만 지키면 시대와 불화하는 문제가 해결되는가? 힘의 의지만 잘하면 시대의 절망을 즐겁게 이길 수 있는가? 자아의 선험성만 수호하면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현존재가 존재만 수호를 잘 하면 존재역사의 올바른 도래나 역사 구원이 가능한가? 하르트만처럼 헤겔의 정신철학에 대한 오랜 연구와 대결에서 헤겔의 정신 개념을 비판하면 객관세계의 문제와 모순과 갈등이 해결되는가? 객관화한 정신과 객체화한 정신은 이러한 문제에 어떠한 도움과 기여를 하는가? 초감각적 세계 인식자로서 영의 존재로 이해된 인간은 독일 당대의 어떤 문제 해결에 기여했는가? 당대 독일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영적으로 역사를 읽고 해독한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되는가? 초자연적 해결책이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가?
3부 영미의 자아담론도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볼 때 마찬가지의 사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자아, 형이상학적 주관으로 철학을 마쳤고 종결했지만 내가 보기에 한 천재의 자기만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철학적 자아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배속되었지만 그러한 철학적 자아로 무엇을 치유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지 의문스럽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철학적 자아 수준을 구조화해서 유지만 하면 세상사는 모두 문제도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인가? 그의 철학적 교지가 영원철학의 견지에서 극히 핵심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헤겔과 테일러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해결모형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해결책은 역사와 사회에 참여하고 걱정하는 데서 나왔다.
통합적 자아에 대한 많은 현대적 논의들은 미시적이다. 미시적인 논의라서 그러한 논의가 태동된 맥락과 문제 상황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가 동기화되고 발전되어 온 사회적 문제와 역사적 현실과의 연관구조가 은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시적 논의가 축적된다고 해서 원문제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미시적 논의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학문적 학술적 주제의식 때문에 기왕에 발생한 문제 상황을 질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현상학적 지향성 이론의 맹점을 지적하고 지향적 자기의식 또는 선험적 자아를 자연화하는 신경과학적 경험적 연구는 현대 심리 철학의 미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다. 자연과학과 현상학의 수렴과 통일과제는 현재 양분되어 있는 영미식 철학과 대륙식 철학에 큰 지형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문제인 만큼 현대철학의 양대 산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만일 그 과제가 성공을 거둔다면 경험적⋅과학적 탐구의 위력은 다시 한 번 입증될 것이다. 그리고 자아 또는 자기의식의 신경과학은 자아와 사회, 자아와 역사에 관한 철학으로 전화하거나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4부 프랑스의 자아담론은 정말로 독창적이다. 그렇다고 라캉의 자아분석이 의식의 해방은 몰라도 사회구조로부터의 해방, 사회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억압된 무의식의 구조는 객관적 현실, 상징적 폭력, 사회구조적 악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와 주체성은 존재와 다른 존재자, 즉 타자를 무한 존재로 역설함으로써 자아중심의 서양철학에 일대 경종을 울렸지만 그 무한성은 타자에 대한 영원한 책임 때문에 타자를 전체화하는 위험을 안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또다시 전체주의적 요소를 함의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타자 중심의 윤리와 주체성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비현실적 거룩한 주체성이다. 그것은 황금률을 철학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리쾨르는 프로이트의 의식과 자아를 해석학적으로 반성함으로써 자아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무의식은 과거의 운명을, 그리고 그 운명을 의식하거나 그로부터 해방되면 의식은 미래를 상징하는 자아의식으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주체로 전화한다. 이제 정신분석과 해석학은 종합되어 무의식이 말하는 것 속에서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적 반성 주체로 재발견된다. 이리하여 무의식과 의식의 변증법적 종합이 성취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인륜이나 국가 또는 역사의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또한 관념론적 사유 놀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자아나 리쾨르의 자아 주체는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의 수준과 한계를 탈피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화 이론이 요청된다는 귀결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각에서의 비평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되기와 같은 의식의 변성 상태에도 적용 가능하다. 의식이 동물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상태 또는 이러한 합일의 양태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그 의의와 가치를 확인하고 실증하지 않는 이상, 역시 극히 개인주의적인 삶의 의미에 그치고 만다. 아무리 유체이탈에 능하고 신족통으로 시공간을 축지해서 영의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고 해도 신이 부재하는 악의 지속 상태가 여전하다면 우리는 그런 일이 이런 상태에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즉 의식의 변성이 사회 혁명이나 해방과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동물 합일 체험, 자연 신비 체험과 같은 관상과 명상이 혁명으로 이어지는 수준에서 사고하는 문제가 물음으로 물어져야 한다. 이 문제를 묻는 이유는 자칫하면 그런 유의 신비주의적 의식들은 타인과 사회적 실재의 고유한 질적 가치와 물질적 구조를 식별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설명하고 박탈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인류 문명의 최고 관점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영과 공의 궁극적 차원, 켄 윌버의 표현을 빌리면, “비이원론적 신비주의”의 인간적 자세에 내재하는 역설이다. 바로 이 문제가 그 물음에 걸려 있다. 이 점이 그 물음의 핵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모든 주체화 이론의 관건은 항상 이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모든 답들이 갈리는 것 같다.
그리고 네그리, 하트, 랑시에르의 주체 이론 역시도 이 문제에 복귀하는 것 같다. 다중을, 인민을 어떻게 자본 제국의 질서나 현 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 질서를 타파하는 실천을 살아내는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게 할 것인지 하는 고민도 바로 그 문제와 함께 얽혀 있다. 그들이 그렇게 거듭나는 메커니즘의 신비스러움에 대한 구체적 해명과 명시화야말로 방금 거론한 고민들을 풀어줄 수 있는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치적 주체화 이론의 고민은 바로 이러한 과제 해결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양한 입장과 답변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방법은 보이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런 해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에 발전과 진보는 있었지만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홉스가 말하는 인류의 자연 상태인즉슨 전쟁과 싸움은 현대 문명조차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자본세와 인류세의 묵시 속에서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계시는 어디서 올까? 탈현대의 마르크스를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역사의 천사를 기다리는 믿음은 환상일까?
이렇게 적어 가노라니 문득 드는 생각은 본 책에서도 보았듯이 서구의 철학적 사유는 정말로 너무도 다양하고 다각적이고 다원론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이론의 통합과 통일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다. 철학이 탄생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도시에 살면서 공직에 나가고자 한다면 민회에 출연하여 자신의 입장과 근거를 잘만 제시하면 선출되는 제도였다.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에서 연사는 타 연사에 비해 자신의 논제와 논거와 논지를 더욱더 정당하게 보이도록 입증만 하면 피선될 수 있었다. 도시의 아고라에서 의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논하면서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러니, 고대 그리스 민주정에서 공직 후보자들은 수사술, 웅변술, 논변술, 변증술, 선전술, 궤변술, 대화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이러한 토론과 논의 방식은 고대 그리스 사회가 발견하고 발명하고 채택하고 받아들인 말하기⋅글쓰기 형식이다. 한 사회의 역사가 이러한 말하기와 글쓰기를 자신의 문화적 생활방식,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육화시켜 왔다면 어떤 유서 깊은 다른 사회도 대적하기 힘든 전통과 강력을 구축했을 것이다. 참으로 요새와 같은 이러한 논문 형식의 글쓰기는 서구 문명의 발명품이고 인류의 영원한 유산일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철학적 사유는 바로 이러한 논문 형식의 글쓰기라는 틀에 구속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유와 해법을 제시하는 데는 아주 능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사고법은 무의식화되어 있어서 그들에게 하나의 억압기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에게는 많은 문제에 대해 숱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그들의 사고 프레임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숱한 사고들을 시전하게 되어 있으므로 자동적으로 창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유의 분화는 필연적인 철칙이다. 그리고 철학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제도화된 역사성을 거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철학 분야에서 후발한 주자들은 부득이하게 아무리 추월하려고 해도 뒤처지는 사정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비상출구를 이용하는 길이지 싶다. 즉 후발 연구자들은 우리의 상황, 우리의 삶, 우리의 역사와 사회가 우리에게 이미 자체적으로 고유하게 주어져 있는 몫이므로 이를 연구 공간으로 열어젖히고 이용하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창조성을 내함할 수 있는 여건을 주제화하고 양과 질에서 확장해 나가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는 서구의 철학 제국으로부터의 탈출, 식민지화된 지적 생활세계의 괄호 치기와 같은 실존적 전환을 수행하는 것이 의지적으로 요구된다. 사실, 말이 실존적 전환이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실존적 전환은 일종의 개종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이 연구하고 존경하고 어떤 때는 숭배하는 철학적 아버지를 살해할 용기를 가진 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자신의 철학적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이 선뜻 일어날 수 있다. 한국철학계의 연구방식은 저명한 서양 철학자의 사상과 이론을 평생 연구하는 패턴이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 내지 철학적 정체성에서 돌아서는 탈정체화 사건은 잘 일어나지 않지만 그러한 물신화된 우상 숭배적 의식이 허위의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수 있다. 자신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이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철학(자)으로 대체되어 있는 일은 허다하며 따라서 그러한 계율이나 금기를 드러내놓고 위반하지 않지만 금기는 위반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철학적 살인은 자신이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 지위를 찬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의 역사는 철학적 살인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각자 고유하게 공을 들여 연구하는 철학(자)은 모두 다 철학적 살인행위(자)였다. 따라서 서구 제국의 철학으로부터의 탈출은 제국적인 철학, 식민화된 철학을 어떻게 살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 시작하는 셈이다.
다른 출구는 논문 형식으로 말하고 글 쓰는 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논문 형식의 말하기⋅글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일 수 있다. 또한 철학적으로 살인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왜냐하면 철학적 살인도 역시 논문 형식을 빌려서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근현대의 계산적 사고와는 다른 사고, 즉 숙고적으로 사고하기, 시적으로 사유하기, 존재사유적으로 사유하기를 발명하고 스스로 수행한 바 있다. 이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철학적 살인행위는 하이데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을 평생 연구해도 하이데거와 같이 사고하는 사고를 창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사유적으로 사고하는 것처럼 논문 형식의 사고하기와는 다르게 사고하는 방식을 창조하고 개발하는 것은 사물과 세계에 새로운 방식으로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논문 형식 이외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방식을 들라 하면 시, 소설, 수필과 같은 문학적 글쓰기가 있을 터인데, 이를테면 니체식의 글쓰기가 그럴 것이다. 니체는 경구나 단상을 철학적 언어로 사용하는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현대 프랑스 소설가 루이–페르디낭 셀린은 명료성과 정확성을 특별히 여겼던 당대 문학의 학술적인 문체에 비판적이었고 다양한 계층의 일상어로부터 인공적인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프랑스 문학 언어를 혁신했다. 그의 문체는 하나의 문학 혁명이었다. 횔덜린이나 말라르메는 시적 언어의 성격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우리는 같은 앎이라도 표현 방식을 얼마든지 달리하도록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우리가 논문 형식의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고 달리는 잘 쓰지 않기 때문에 낯선 것이며 쉬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언급한 역사적 사례를 미루어볼 때 논문 형식의 글쓰기나 사유 프레임에도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셀린처럼 학술용어에다 비체(abject) 언어, 구어 등을 섞어서 사용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고 계속 개발하고 표현해 갈 수 있다면 이 또한 논문 형식의 글쓰기처럼 제도화할 수 있고 문화적 전통으로 전승할 수 있다. 더군다나 논문 형식과 같은 지배적인 글쓰기는 역사적 기원과 토대를 가지고 있고 합리적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변혁될 수 있다. 역시 친밀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관건이다.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적으로 사고하는 전형을 모범으로 삼는 기억도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매뉴얼일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하는 것이 정말 창조가 가능할까? 만일 발견하거나 발명할 수 있다면 인류 역사상 하나의 문화 혁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2000년 동안 인류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논문 형식에 따르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대체하는 발명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러한 형식의 혁명적 글쓰기가 어떠한지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형식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개념의 창조이고 사유의 창조라는 점에서 가장 철학스럽고 또 가장 철학다울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와 맥락은 주로 외부 사정과 관련된 것이다. 잠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내부 사정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고려할 때 현대 한국의 역사적 상황은 산업화 시대의 한국의 민중신학처럼 한국의 해방철학을 배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등의 제반 분야에서 누적된 모순과 갈등이 가시화되어 터져 나오고 있는 현 상황은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을 암시하는 양, 시대를 사유로 포착하는 철학자의 책임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현 상황이 사회 해방을 지향하는 철학이론의 창달을 요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믿고 싶다. K–팝, K–드라마 같은 K–컬처, 코로나 방역 같은 K–과학처럼 한류 문화가 K–철학으로 흐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글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K–철학의 탄생,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출생이다. 이러한 철학 출생의 실천은 우리 자신의 실존적 주체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 탄생을 위한 시작점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K–철학이 세계적 트렌드로 자립할 수 있는 특단의 학술연구집단을 구성하고 육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서구 철학이 자신의 근대성을 세계 바깥을 향해 보편성이라고 요구한 지는 18세기부터 현재까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알고 보면 그들의 보편성 주장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다. 지금부터 200년, 또는 2000년이 지난 뒤 서구 철학의 그런 자부와 요구는 골동품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서구의 철학적 이론과 인간관이 라스코 동굴의 벽화처럼 구석기 시대의 것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러한 철학이론의 연구와 개발이 시대의 아들로서 철학에 충실하고 성실한 철학자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된다. 글로벌 문화 경쟁 속에서 자아에 한정된 담론에서 자아와 사회에 관한 철학, 자아와 역사에 관한 철학으로 지경을 넓혀가는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 개념의 창조로서 철학에 충실한 시의적절한 철학의 소임이다.
5부 한국의 자아담론에 실린 다섯 편은 원래 이러한 생각들에 의거해서 선정한 글들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주체적, 해방적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만한 글들을 담았다. 이 글들이 전부 다 굳이 나의 생각들을 지지해 주는 글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약간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독일⋅영미⋅프랑스의 자아담론과 비견해 볼 때 한국의 자아담론은 비교적 역동성을 띠고 있다. 우리가 한국에서 철학하는 것이 선진적 철학적 사유들을 보고 따라잡고 추월하는 사유를 건축할 수 있는 데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것을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서양철학의 제국성을 비껴갈 수 있는 첩경일 수 있다. 이러한 우회로가 정면돌파는 아니지만 한 가지 방편일 수는 있다. 한국의 자아담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기 바란다.
제3권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담아서, 현재의 사회 문제의 핵심이자 인류의 명운이 달려 있는 환경ㆍ생태 이슈를 중심으로 필터링을 했다. 여기에는 환경생태의 위기와 패러다임 전환, 환경생태철학의 최근 동향과 쟁점, 그리고 현재 논란 중인 동물 윤리의 쟁점이 포함된다. 제3권은 그 제목이 서양의 환경생태철학이다.
제4권은 그 제목이 기술사회의 철학적 성찰이 될 것이지만 현재 준비 중에 있다. 그 구성은 4차 산업혁명의 엔진인 과학ㆍ기술을 화두로 하는 주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기술사회의 위기의식, 기술사회에 대한 윤리적 접근, 기술사회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대응 방안들이 포함될 것이다.
주지하듯, 지구 행성은 이제 정보를 일일 내에 실시간으로 소유하고 유통하는 시대에 진입했다. 어떠한 철학도 이제는 동서사상의 만남과 융합에 구속되지 않을 수 없는 정보의 초연결 사회에서 철학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철학의 전문화와 칸막이 현상은 그 한계를 노출하게 될 것이다. 그 한계가 여전히 공고하다고 해도 인류세ㆍ자본세에서 동서사상의 융합 추세는 거스르지 못할 것이고 또 거역해서도 안 된다. 인류의 지혜를 모아서 4차 산업혁명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예상 딜레마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징조를 의식한 탓에, 본 편집자는 서양철학 분야에서 편집한 세 권의 책 제목에 상응하는 자매편을 동양철학 분야에서도 똑같이 편집하자고 제안했고 이를 김상현 선생님이 수용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 동양철학 분야도 세 권의 책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편집 기획은 철학의 문제에 대한 동서철학사상의 접근과 대응을 대조하고 대비하며 반면케 함으로써 학회 회원과 연구자들에게 사유의 폭과 깊이를 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동서철학사상의 주체성과 세방화의 문제를 환기하며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동서양의 보편성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동양철학 분야에서 간행되는 세 권의 책은 다음과 같다. 제1권은 그 제목이 성리학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이고 제2권은 동양의 자아철학이고 제3권은 동양의 환경생태철학이다.
편자로서 나는 동일한 주제로 동서철학사상 분야에서 편집하되, 짝을 이루는 삼부작을 발간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하고 싶다. 이 한 쌍의 삼부작이 행여 동서사상의 보편성을 발굴하거나 새로운 미래철학의 동서통합을 위한 철학적 영감을 얻는 데 작은 단서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빛은 동방에서!(Ex Oriente Lux)
본 편집자는 세 권의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떤 바람이 생겼다. 이도흠 교수에 의하면 현재는 인류세ㆍ자본세로 규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서 이 시대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딜레마에 놓이게 될 터인데, 이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대안사회의 모색과 수립이 인류에게 주어진 긴급과제라고 제안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과학기술의 선과 악’, ‘인공지능의 선과 악’, ‘생명공학의 선과 악’, ‘생명정치의 선과 악’의 기로에서 문명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는 지구 행성의 현실에 대한 직시로부터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묵시로부터 이 묵시를 전복할 수 있는 시대적 징조와 사명을 우리 학회가 철학자의 사회적 책임의식에서 수행할 수 있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것은 대한철학회의 철학연구가 대안사회의 모색과 수립이라는 학술 정책면에서 이러한 논문을 발굴하고 우선시함으로써 사회의 여론을 환기하고 형성하며 의식 구조를 바꾸는 데 영향을 발휘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국내의 모든 철학회가 이러한 인류 문명의 문제와 과제에 한 마음으로 달려든다면 철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대할 것이다. 대한철학회가 이 일에 앞장서는 주역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세 권의 책을 편집하는 책임자로서 양해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선정된 원문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편집 체계와 목적상 다르게 편집되는 부분이 발생했는데, 이 부분, 특히 편집된 논문 제목에 대해서는 원저자의 혜량을 구하고자 한다. 또한 논문의 형식적 면에서 가급적 통일을 기하고자 했으나 발표 당시의 원문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에 완벽하게 통일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가독성을 위해 본문 한자는 거의 모두 한글로 표기했고 필요하면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했다. 물론 내용은 원래 그대로이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편집자의 책임임을 밝혀 둔다.
2023년 9월
편자 류의근
서양의 자아철학 목차
서양의 자아철학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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