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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문화

악의 도전과 인간의 응전 책 출간

원제목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입니다.(요한1서 3:8)

부제목은 악의 도전과  인간의 응전입니다. (대장간, 2024)

 

책의 서문을 올립니다. 다만 이것은 교정본이오니 최종 완성본은 책의 서문을 보기 바랍니다. 

 

 서 문 

 

서문을 쓰기 위해 70의 나이에 10대의 시절을 회고한다. 10대의 나이에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 나이에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죽음은 나에게 어떤 조용한 내면의 충격을 주었다. 그때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죽음이 하나의 억압으로 작용하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 죽음의 경험은 10대 후반에 내가 철학을 하게 된 동기였다. 죽음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조금 알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 숱한 철학적 죽음론은 죽음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식적 감정을 하나도 바꾸어 놓지 못했다. 죽음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언급한 사람치고 이 자연적인 두려움을 완전하게 탈피한 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죽음은 악의 문제였다. 죽음은 삶의 양면이었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죽는 것을 사는 것이었다. 삶을 사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였다. 죽음은 삶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다. 그 적은 살금살금 나의 내면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은 보이지 않는, 억압되어 있는 권력이다. 죽음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든 않든 하나의 힘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억압되어 있다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죽음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대로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일상을 잘 살다가도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죽음 충동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 생물에게 죽음의 부정은 불가피한 필연성이지만 필멸성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 양면성 속에서 인간 생물은 고통을 겪고 불멸성을 추구한다. 죽음이 선이라면 불멸성을 애써 추구할 필요가 없다. 죽음이 고통을 주는 악한 것이라면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되면 죽음은 악으로서 피해야 할 대상이다. 죽음은 인생에서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휘두른다. 죽음은 인생의 고통이다. 삶의 고통은 악이다. 따라서 죽음은 악이다. 죽음은 삶을 갉아먹는 악이다.

악과 대면하고 대결하는 것은 삶의 주된 경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태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악에 대한 깨침은 하나의 은혜이다. 죽음에서 보듯 그 악은 삶 속에 공생한다. 삶은 숙주요 악은 기생충이다. 악은 삶을 먹고 살기 때문에 삶을 사는 사람은 악을 별로 의식하지 못한다. 보통은 삶을 살 뿐이지 악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다면 삶의 철학은 사실상 악의 철학이다. 그러나 삶의 철학은 악을 주된 인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악은 삶 속에 내재적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이야기하지만 상대적으로 악은 별로 많이 거론되지 않는다. 악을 직시하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삶을 말하는 것은 반쪽만 말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삶의 역사를 기록하지만 그에 비해 악의 역사는 적다. 대체적으로 악의 사료는 그 크기와 규모에서 삶의 사료보다 덜하다. 물론 삶의 사료에 악의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삶이지 악이 아니다. 서양철학의 역사를 보아도 삶과 세계와 역사를 성찰하지만 악이 주제거리는 아니다. 악은 철학의 보조재에 그친다. 한나 아렌트 말대로 악은 진부하고 평범한 사태라서 철학적 인식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독일 나치즘의 악행이 당대의 사유 불능이나 부전 때문이라면 이는 거꾸로 말하면 악은 지각되지 않게끔 또는 각성되지 않게끔 존재한다는 뜻이다. 악은 삶의 응달이기 때문에 그 응달진 모습은 인식 대상에서 빠져나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악이 철학의 본 재료가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 점은 서양철학의 교만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현실의 삶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에 숨어 있었던 악의 삶에 대해서는 덜 고려했던 것이다.

이제는 악의 삶을 철학의 대상으로 주제화해야 한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철학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상 사회의 추구와 건설이 기대치와 다르게 끝난 것은 현실 속의 악과의 대면과 대결을 심각하게 다루지 못하고 악을 그 뿌리에서 살펴보지 못하며 다각적인 학제적 연구와 연대의식을 도모하지 못해서이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심오한 철학이라고 해서 악의 해소와 제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하이데거의 철학만큼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철학도 드물지만 그가 당대의 악한 현실을 소박하고 순진하게 지각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심오하고 경건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위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담고 있다고 해서 악한 역사적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의 역사적 현실을 오도하는 인식은 악에 대한 이해가 너무 심오한 탓이거나 사유가 지나치게 부전증에 빠진 탓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듯 그것이 심오한 사유였다면 자기 눈앞의 현실 하나를 바르게 지각할 수 없는 허망한 진실이었음을 우리는 주시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 현실을 존재 사유의 이름으로 오도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일 존재 사유의 초월성이 역사적인 구성물이라면? 초월성도 역사적이라면?

나는 수잔 니이만이 철학의 뿌리는 악에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악의 문제를 모든 사유의 뿌리에 두고 다시 한 번 우리의 관심을 환기하고 거기에다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하고 싶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는 많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거쳐 왔고 철학적 진리 프로그램은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허무주의 시대의 탈출구로서 악의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안한다. 악의 패러다임을 철학적 사유의 프로그램으로 채택하는 것은 탈현대 시대의 철학적 전환이다. 이 전환은 현재의 철학에 대한 불만과 항의의 표시이다. 철학이 악과 고통의 현실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하고 날카로워졌으면 한다. 부서지고 망가진 세상은 철학자를 호명하지 않는가? 이 호명에 응답하는 것이 철학자의 책임이 아닌가? 의미 과잉과 의미 상실의 허무주의적 시대 상황 속에서 악의 프리즘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철학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삶의 보편적 의미를 발견하거나 구축하는 것은 미래철학의 새로운 과제이다.

다들 느끼다시피 세계는 구제 불능이고 교정을 기대할 수 없다. 선과 지혜가 이기고 악과 어리석음이 지는 세상은 보기 힘들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도덕적 세계관은 예수도 믿었지만 이러한 세계관의 합리성은 위태로운 처지에 있다. 오래 전에 욥기와 전도서의 기자도 그러한 세계관을 의문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시대의 전환기를 살았고 그 과정에서 신정론적 도덕적 세계관의 전통이 해체되는 것을 경험했고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는 세계관을 물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대체할 세계관을 묻는다. 그렇지만 인과응보의 전통적 세계관을 대체할 세계관이 딱히 그리고 정히 보급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세계관이 주어졌다고 해도 인과응보의 도덕성의 골조를 거부한다면 받아들일 이가 몇이나 될까? 선악의 피안은 초인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동물이지만 초인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인과응보의 도덕관을 따라 판단하고 평가한다. 이들은 악을 심판하지 않으면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인류는 최후까지 악을 추적해서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이것은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을 거부하면 지구 행성은 무질서와 혼돈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상상의 천국보다 현실의 지옥을 좋아하며 선호해야 하는 이유이다. 결국 우리는 인과응보의 도덕적 세계관의 합리성을 보장하고 공고히 하는 길이 덜 탈현대적이기는 하지만 최선 아닌 차선책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이 책의 중심 내용은 2021년 대한철학회 가을 학술 발표 대회 (주제: 갈등에 대한 철학적 성찰) 기조 강연 원고로 집필되었고 발표 후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약간의 가필을 거쳐 수정 보완되었다. 처음에 대구교육대학교 장윤수 교수의 발표 권유가 있었고 발표 후 사적 대화 가운데서 계명대학교 이재성 교수의 책 출판 의견이 있었다. 이렇게 책으로 나올 수 있게끔 동기를 준 두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 준 대한철학회장 이종성 충남대 교수님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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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의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