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시편의 하나님 주권을 묵상하면서..

손정호

시편을 묵상하면서 시편기자가 담대히 외치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생각이다. '하나님 주권'이란 말그대로 온 세상과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교회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온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현실에서 수시로 과연 하나님 주권이 모든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한다는 것에 의심을 한다. 그 의심의 틈새에는 이런 질문들이 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세상이 선과 정의, 평화와 사랑 따위의 가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폭력과 부조리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승승장구함과 무지하고 가난한 자들의 억눌림은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왜 참 진리이고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하는 교회공동체가 더 부패하고 부조리한 모습으로 역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런 의문 앞에서 하나님 주권 신학은 우격다짐식으로 우리의 믿음만을 요구하는 듯하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인간의 체계화된 표현양식인 신학에는 하나님 주권뿐 아니라 '자유의지'라는 사상도 있다.

'하나님 주권'과 '자유의지'는 5세기의 히포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밀라노 칙령이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한창 전성기를 누리려는 때에 타락하고 부패한 로마와 그리스도인들을 보던 영국출신의 뛰어난 학자 펠라기우스는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기존의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을 한다. 펠라기우스는 우리에게 선을 이행할만한 ‘자유의지’가 있고 그 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교세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교회는 펠라기우스가 눈에 가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이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이 논쟁은 정통과 비정통, 승과 패의 싸움의 구도로 몰아져 갔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승리는 ‘은총’을 강조한 어거스틴에게 돌아갔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는 패자로 말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거스틴의 승리가 이후 신학과 교회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정통'과 '비정통'을 갈라놓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다. 신학은 그 진리를 이해한 인간들의 언어에 불과하다. 때문에 신학은 우리를 더 깊은 진리로 견인하는 안내자역할을 하기도 하고 우리의 진리를 향한 뜨겁고 순수한 영혼을 타락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교회사의 희미한 펠라기우스의 목소리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되살아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사상의 합리성에 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강조. 즉 깨어있는 양심과 신앙의 의지로 개인적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도 합리적인 덕목이기 때문이다. 2012년 대한민국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에게도 이 합리성은 동일하게 중요하다.
2010년의 한진중공업 파업사태처럼, 갖은 꼼수로 자기 이속을 다 채우면서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을 간단하게 해고시키는 기업을 보면서,
2011년 일본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면서 유출된 방사능으로 엄청난 피해를 지금까지 입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도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는 커녕,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수명이 다한 문제투성이 원전을 재가동하고 신규 발전소를 마구 짓는 정부와 관계기관을 보면서,
2012년 성폭력으로 목회지에서 쫓겨난 목사가 버젓이 인근에서 교회개척을 하고, 용역동원도 부족해 가스총으로 진행하는 교단총회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맡기고 두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를 신앙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태도가 얼마나 유익한지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두 신학적 입장을 감히 통합시키려거나 새롭게 정립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이 두 입장이 우리 안에서 화해하며 함께 거하길 원할 뿐이다. ‘하나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소화되어 형체가 없어질 음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몸의 장기처럼 내속에 늘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편은 어떤 책인가. 이스라엘 민족들이 제사를 비롯한 일상에서 하나님 주권을 노래하며 기도문으로 낭독한 찬송이고 시이다. 무수한 탄식시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찬송시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내용은 단순히 기도자의 개인과 가정을 넘어서서 국가와 열방, 온 우주가 그 무대이다.
주위에 숱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리상으로 무역과 전쟁의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끊임없는 침략과 약탈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청하며 불렀던 노래가 시편이다. 평탄한 가운데 관념적으로 하나님 통치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처절하고 고난한 일상에서 소망없는 중에 하늘을 바라보며 외친 절규가 시편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더 강하게 구할 수 밖에 없는 작금에, 정직하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시대적 책임들을 해나가는 게 시편을 노래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심정에 가장 가까워 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본회퍼의 한마디로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