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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평론

한국교회와 정치

[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포럼 발제자료]

 

[한국교회와 정치]

                                                       김형원 목사 (하나의 교회 목사, 복음과 상황 발행인,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원장)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과거에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된 것이든, 아니면 경험에 의해 생긴 것이든, 아니면 혼자 오랜 세월 숙고한 결과로 생성된 것이든, 개인에겐 사회-정치적 이슈들을 판단하는 어떤 원칙들이 존재한다. 그 원칙을 가지고 정치가들을 선택하기도 하고, 어떤 정책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도 한다. 경제적 성장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흠결이 있더라도 오직 경제를 발전시킬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의와 공평이라는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정치를 펼칠 사람을 지지하게 된다. 정치인 자신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표를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공약을 내세우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부합하는 공약을 내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임한다. 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원칙이 있는 것처럼 사회-정치를 움직이는 데에도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삶에도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는 것처럼 사회와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평가하는 데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행동의 표준이 되는 성경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성장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서 성경을 통해서 개인적 삶의 기준과 원칙들을 제시해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회를 형성하시고 그 사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회와 정치에 대해서도 바른 원칙과 표준들을 제시해주셨다. 이것들을 우리는 정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사회적-정치적 규율들을 제시해주신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 문제를 다룰 때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세상의 여러 이슈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해결 방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그것을 적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라 함은,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적 제자’를 칭함이 아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삶의 제자’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정치적 영역에서도 주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정치적 제자’(political followers)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폴 마샬의 말처럼, “우리의 정치(행위)는 우리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며, 믿음으로부터 흘러 나와야 하며, 믿음으로 버티는 것이어야 한다.” (폴 마샬, 정의로운 정치, 29)

 우리는 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가? 우리는 왜 보편적인 복지제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가?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그 문제를 판단하는 성경적인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은 정치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종교적인 문제들이다. 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가가 우리의 “믿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 현실을 판단하는 성경적 원리를 먼저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정치는 성경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여 세상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이들 이원론적인 사람들은 경제에는 경제의 논리가 있고, 정치에는 정치의 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각 영역마다 주관하는 신들이 따로 있다는 혼합주의 신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구약 시대에도 가나안에 살던 부족들은 이런 신관을 가지고 있어, 평야를 다스리는 신과 산지를 다스리는 신, 그리고 바다를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국 이런 혼합주의적 신관에 물들어서 하나님과 이방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면 가정에서도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어야 한다. 또한 경제 영역에서도, 정치 영역에서도, 문화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여 그 원리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태도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원리보다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계층, 자신의 경제적 상황, 자신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그런 것들이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작동한다. 그 결과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깊이 있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고찰 없이 자신의 견해를 결정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그가 제시해 주신 원리는 자신의 상황과 이익보다 순위가 밀리게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잘못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원리가 있으며, 우리가 부지런히 추구한다면 그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정치가들이 정치행위를 할 때 지침으로 삼아야 할 기독교적 정치원리를 제시해주셨다. 비록 성경이 정치학 교과서는 아니지만, 그 속에는 정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원리와 지침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연구해보면 몇 가지 중요한 지침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아래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추구해야 할 성경적인 원리들을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성경 시대에 정치가들을 평가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가 근간으로 삼아야 할 원리로 제시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우리가 정치지도자들을 평가할 때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준도 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들을 기준으로 정치인을 선택하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해 왔는지를 반성하면서 하나씩 살펴보려고 한다.



 <원리 1> 국민 전체의 유익을 구하는 정치


 정치가는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자로, 국가를 잘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을 맡은 자로 세워졌다. 그러므로 일단 통치자의 자리에 앉은 다음에는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기 이전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대통령을 어떤 정당의 대통령이나 어떤 지역의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고 '국민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통치자는 자신이 속한 정파와 계층이 있고, 정권을 잡는데 도움을 준 세력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국가의 통치자가 되면 국가 전체의 이익을 구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물론 어떤 정책이 국민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되기는 어렵다. 그 정책으로 인해 어떤 계층은 혜택을 많이 보게 되는 반면, 반대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공리주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모든 국민들에게 다 유익이 되는 결정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원리가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약자 보호 원리와 같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다른 원리들에 저촉되는 정도까지 이 논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예로 현 정부의 법인세 감세 정책을 살펴보자. 2012년 10월 8일 국정감사에서 무소속 박원석 의원이 배포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2009년~2010년 2년간 법인세 감세혜택의 65%가 대기업 몫으로 돌아간 것으로 밝혀졌다. 2년 동안 기업들은 모두 13조2천126억원의 법인세 감면혜택을 받았는데, 그중 최소 65%인 8조5천720억원이 대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특히 2009년에는 과세표준 2억을 기준으로 11~22%의 세율을 적용한 결과, 감세총액의 63.3%인 3조 6천23억원은 매출이 1천억이 넘는 대기업에 혜택이 돌아가고, 중소기업에는 36.7%인 2조 907억원의 혜택만 돌아갔다. 매출 20억 이하 소기업의 경우 업체당 감세 혜택이 10여만원에 불과, 14만여개에 달하는 소기업의 감세혜택은 전체의 0.5% 수준이었다. 반면 매출 5천억이 넘는 대기업은 업체당 65억원의 감세혜택을 누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세금감면 혜택을 누린 대기업은 삼성전자와 포스코, 현대자동차로 업체당 1천400억원에 달했다. 정책 책임자들은 기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법인세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받아야 할 중소기업은 거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다수를 무시하고 소수에게 혜택을 주는 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원리 2> 정직과 진실


 통치자들이 행하는 모든 정치와 정책 결정은 ‘진실함’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실이 사라지면 온갖 왜곡과 불의가 판치게 되며, 권모술수가 승승장구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정책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놓고 토론하고 우열을 가리는 모든 과정은 일단 진실이라는 토대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만약 권한을 가진 자들이 진실하지 않으면 사회의 안정이 매우 위협을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개인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세력들만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선 국면에서 정당들과 언론들은 후보들이 과거에 한 거짓말, 논문 표절, 말 바꾸기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대통령이 되려면 진실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우리는 거짓말을 일삼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정치인들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관대하게 봐온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선거 전에 그렇게 치열하게 검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MB 정권 초기에 일어난 광우병 시위와 논란에 대해 정부는 국민들에게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하겠다고 여러 번에 걸쳐서 약속했다. 그러나 결국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기가 지나간 후에 국민들을 속인 것이다.

 2008년 10월 23일 국정감사에서 2008년 8월 11일 방송통신위원장 주관으로 국정원 제2차장, 청와대 대변인, 한나라당 6정조위원장 등 정부·여권 관계자들이 모여 회동을 가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모임에 대한 의혹은 꾸준하게 제기되었지만 정부는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결국 사실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와 집권당은 정권 차원에서 언론 장악을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그 회동 이후 KBS, MBC, YTN, 연합뉴스의 사장이 모두 교체되고 3개 방송사가 동시에 파업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진실하지 않은 정치인들의 행동은 국민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된다.



<원리 3> 인권의 존중


 기본적으로 통치자는 국민의 봉사자로 세워진 것이다. 권력자 자신과 추종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이용하라고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통치자가 가장 존중해야 할 것은 국민들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통치자는 어떤 고상한 목적이 있다 할지라도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권은 인본주의 사상의 산물이 아니다. 이미 성경에서 보장되고 있는 개념이다. 창세기 서두에서부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라고 선언한다.(창 1:27-28) 이것은 그 어떤 사회적 사상보다 뛰어난 인권 옹호 논리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담겨 있으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형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창 9:6)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편파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외형적인 기준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외형적인 차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본질적인 고상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므로, 사람들도 동료들에 대해서 동일해야 대우해야 한다.(신 10:17, 벧전 1:17) 예수님도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셨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내가 인간으로서 소중한 만큼 나의 이웃도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권리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통치자들은 모든 국민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좀 더 풍요롭게 사는 것은 부가적인 것이다. 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아무리 풍요롭다고 해도 국민들의 인권, 즉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통치자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사상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고전적인 인권(자유권)을 보장하는 한편, 그 누구도 성별, 직업, 종교 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평등권), 더 나아가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을 누릴 권리(사회권)까지 보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5년간 우리나라의 인권 수준이 심각하게 하락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이 정부 들어 인권위원회 규모를 절반으로 축소하여 결국 인권위원장을 중도에 사퇴하게 만들었고, 뒤이어 인권 업무와 무관한 현 위원장을 취임시킴으로써 세계국가인권기구 의장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용산 사태로 6명이 죽어도, 쌍용자동차 대량해고 사태로 인해 22명이 자살해도 인권위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였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부터 시작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은 아직도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이 정부 들어 최저임금(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은 연평균 5.2% 상승하는데 그쳤다. (참여정부 연 평균 10.64% 상승).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거의 제자리걸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언론의 자유도 계속 줄어들어서 결국 국제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우리나라 언론자유 지수가 30위에서 67위로 강등시키고,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재분류하였다.

 우리의 삶이 어떤 점에서 나아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나에게만 피해가 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태도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큰 계명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리 4> 정의


 통치자는 사회가 어떤 원리 위에 구성되고 운영되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선인과 악인도 함께 살아간다. 바른 사회는 선이 승리하고 선인이 대우받는 사회일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치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논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성경은 정의란 간단하게 말해서 선이 승리하고 선인이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정의는

 첫째, 불의와 대비되는 정의다. 하나님은 사회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씀하신다. (사 61: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둘째,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이 정의와 연결된다. (시 103: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The LORD works righteousness and justice for all the oppressed.))

 셋째, 공정한 재판과 법의 집행도 정의와 연관된다. 법의 대상은 국민 모두다. 법 위에 특권층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법을 만든 사람도 그 법에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신 16:18-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넷째, 공정한 법의 제정도 정의의 하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행하는 착취를 합법화하는 법률들을 제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사 10:1-2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악법은 말 그대로 악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권력의 남용이요 하나님의 정의의 왜곡이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박해할 때에도 무법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치밀하게 법을 제정하여 법대로 박해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1935년 뉘른베르크법) 1970년대의 긴급조치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거의 헌법적 가치를 지니는 법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민주화 욕구를 잠재우기 위한 폭압적 조치였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하는 대리자로 임명받았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통치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에 해당된다. 아무리 높은 건물을 세우고, 고속도로를 놓고, 먹을 것을 더 많이 준다 할지라도 정의가 상실된 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그런 사회를 만든 통치자 역시 하나님의 엄중한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대히트는 우리 사회가 정의를 얼마나 목말라하는지를 보여주는 증표라고 볼 수 있다. 재벌 회장의 휠체어 출두와 집행유예 선고 속에서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과 기관에 대한 초법적인 탄압은 힘으로 모든 것을 쟁취하려는 권력자의 횡포를 느끼게 해 준다. (PD수첩, 2580의 수난, KBS 사장 강제 사퇴)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는 정권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을 잇고 있다. 결국 이번 정권의 핵심 권력 실세들이 모두 구속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상득, 최시중, 박영준, 신재민, 은진수, 추부길, 김두우, 이영호)

 우리는 파벌, 출신 지역, 이념, 개인적 이익, 종교를 빌미로 정의의 시행을 왜곡시킬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중요한 한 가지 원인도 그런 이권에 의해 정의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공평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의 핵심 원리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잣대로 정치 권력자들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원리 5> 공동체 (약자 보호)


 원래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구성한 사회도 당연히 공동체적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인간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개인주의를 더 설파하려고 하나, 사회는 구성원의 삶이 서로 얽혀 있는 공동체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들은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의존하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하나님의 사회법도 이스라엘이 공동체라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의 약자들(고아, 과부, 나그네, 외국인)을 돌보라는 것,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낱알을 남겨두라는 것, 옷을 전당잡았을 때에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것, 굶는 사람이 있는데 부자들만 호의호식하지 말라는 것, 안식년법, 희년법) 그러나 이스라엘은 공동체 정신을 버렸고, 그 결과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졌으며,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는 사회로 전락하였다. 하나님은 이를 묵인하지 않으셨고 결국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행하셨다.(사 1:21-26, 렘 22:3-5, 암 6:3-14)

 세상의 통치자는 국민 모두를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특별히 사회의 약자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권력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으신다. 사회의 약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을 변호할 사람도 찾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애써야 하며, 그들이 비참한 삶의 형편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종종 편파적인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회에서 소외되고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약자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관심을 받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72:1-4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은 사회가 공동체 정신으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권력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무한대로 자기 영역을 확장하지 않도록 제한하면서, 사회의 약자들이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계속되는 양극화로 인해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에 절망의 비관적인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청년실업문제, 비정규직 문제, 농어촌의 몰락,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교육 구조 문제는 수많은 실패자와 포기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 결과 삼포 세대가 등장하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삶을 포기할 정도의 극단적인 형편으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카드 해외 사용량 기록 갱신, 외제 자동차 판매 증가, 해외 유명 브랜드(명품)의 지속적인 수입 증가라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점차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현상으로 보인다.

 경제, 교육, 생태, 복지 정책은 사회를 공동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핵심적인 영역이다. 우리는 그 각각의 영역에서 통치자들이 우리 사회를 공동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내게 이익을 주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보듬고 세워줄 수 있는 정책이라면 적극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의지를 가진 정치가들을 세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정치적 행동이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됨의 정치적 표현


 이제 우리는 한 정권이 끝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시점에 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치 원리들은 과거의 정권을 평가하는 데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통치할 정치가들을 평가하는 잣대로도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유력한 세 명의 대선 후보자들은 하나님의 잣대로 재어볼 때 어떤 점수가 나올까? 그러나 이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런 성경적 잣대로 후보자들을 평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표를 던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의 성향, 지역, 연고, 이권에 따라서 표를 던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세상과 닮아있다. 다른 점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세상과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정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의 정치행태나 투표행태가 비기독교인들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다.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나라에 살지만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논리보다 하나님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 정치를 판단한 결과도 달라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때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즉 온 세상이 오직 경제라는 잣대로만 판단할 때 우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원리가 있다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정의와 공평, 진실과 인권,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를 우리 역시 강조해야 한다. 이런 가치들이 현실 정치에서 무시될 때에도 우리는 고집스럽게 주장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치의 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