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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문화

자본주의 경제의 구원이 출간되었습니다.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역서 자본주의 경제의 구원을 출간했습니다. 역자 서문도 게시합니다. 목차도 게시합니다.

총서 간행사

총서 편집자 서문

저자 서문

역자 서문

서론: 파리는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1장 다중: 욕망의 미시 정치

2장 자본 욕망: 욕망의 경제로서 자본주의

3장 자본주의: 잘못된 점

4장 자본주의 신학: 자본주의 욕망의 고뇌

5장 다른 경제의 가능성: 욕망의 경제로서 교회

6장 구원의 경제

7장 기독교 경제학

8장 자비 사역

결론: 불의한 재물, 친구, 그리고 영원한 처소

 

역자 서문

 

류의근(신라대학교 철학 교수)

 

이 책은 신자유주의적 지구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의 탈근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탐구한 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탈근대사회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기독교 또는 교회가 대응해야 하는 방향과 내용을 제시했다. 저자는 기독교의 전통과 신학이 자본주의 경제의 비인간성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확신을 탈근대철학자 푸코와 들뢰즈의 정치 철학을 선용함으로써 매우 독창적으로 그리고 정교하게 논변하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저자의 논변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저자의 논변의 창의성은 자본주의를 욕망의 경제로 풀어내는 기술에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는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소비분배유통판매라고 이해되지만 저자는 이 점을 잘 알면서도 경제가 경제활동을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규율하고 훈육하고 통제하는 체제라고 규정한다. 이를테면 경제는 우리의 욕망, 인간관계, 사랑, 하나님 이해를 통어한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의 자본 논리는 만인과 만물을 시장의 효율성으로 환원하다 보니 상품교환 가치 이외의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의 최강점이자 맹점이지만 이 맹점의 폐해가 너무나도 위중하기 때문에 많은 친자본주의자, 반자본주의자들은 그 대안들을 모색해 왔다. 저자는 신학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우리의 욕망과 의식을 지배하는 방식을 기술하고 이를 치유할 수 있는 해법을 치밀한 논리에 따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무신론적 탈근대 사상의 긍정적 가치를 잘 보여주고 이들의 이론적 가르침을 진지하게 배우고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에 입각해서 이들 이론의 한계를 날카롭게 적시하며 자본주의 경제의 잘못된 점을 파헤쳐서 석명한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출애굽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제국의 압제에서 탈출할 때 그들을 약탈한 것처럼 저자는 똑같이 무신론적 정치 철학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치고 출애굽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대안 경제의 청사진을 그리고 그 구체적 형상들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본주의는 욕망의 경제로서는 좋지 않은 것이라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반면 그는 교회를 좋은 욕망의 경제로서 모형화한다. 경제가 신 노릇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를 욕망의 경제로 확립하고 교회의 본래적 가치의 현대적 의의를 소생케 한 것은 정말로 저자의 탁견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통찰 덕분에 교회는 자본주의의 욕망의 경제를 구원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일 수 있다.

 

교회를 자본주의적 욕망의 경제를 구원하는 기관으로 정초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속죄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는 자본주의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제적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안셀무스의 총족설, 바울의 대속설에 입각해 경제적 논리의 견지에서 경세적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현대 사회가 속죄 이론을 기독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주목을 요하는 탁월한 통찰로 사료된다. 그 요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는 돌아온 탕아에게 베푸는 아버지의 과분한 선물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증여하는 회개와 용서를 위한 도를 넘는 선물이라는 것이고 이 증여는 인간의 욕망을 새롭게 창조하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이 인간성을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증여 행위말로 현존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질서와는 다른 하나님의 경제적경세적 질서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제적 삶은 바로 이 삶을 그야말로 선물 그 자체인 것으로 사는 삶이다. 이것이 교회가 살아야 하는 삶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경제적 질서는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성업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는 은혜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삶을 경제적으로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경제 즉 구원을 가져오는 경제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경제이다. 저자는 이러한 경제를 신성한 선물 경제, 거룩한 경제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신의 경제 운동, 거룩한 경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운동을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로 왜곡되고 부패해진 인간의 욕망은 치유된다. 자본주의 경제는 욕망을 왜곡하고 기독교 경제는 욕망을 치유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경제학, 기독교가 구상하는 경제학은 이러한 경제 운동을 연구하고 벌이고 추구하는 탐구 활동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경제학은 신학적 경제학인 셈이다. 세간과 달리 신학이 먼저이고 경제학은 그 뒤이다. 이 점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테제이다. 어쨌든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 경제는 경제적 인간의 경제 활동이고 기독교 경제는 예배하는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신학적으로 잘못 되어 있고 기독교 경제는 신학적으로 올바르다.

 

저자는 기독교 경제학의 전형으로 자비 사역을 예증한다. 자비 사역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추구해 왔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인간 욕망의 새로운 경제 질서를 구현하는 경제 활동이다.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욕망의 경제로서는 같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간 욕망을 자본으로 향하게 하고 기독교는 그로부터 인간 욕망을 구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대립대항대안 관계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욕망의 질서와는 다른 욕망의 질서를 규율하고 훈육하고 구현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푸코와 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을 위해 모색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욕망의 질서 구축과 계보학을 능가한다.

 

이 책은 신학, 철학, 경제학에 관해 교양을 가지기 원하는 독자를 비롯해 전문 연구자들이 모두가 읽어야 하는 책이다. 기독교인의 필독서임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질서가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길들이는지는 현대인이라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와 교회가 사회 변혁의 기수가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긍정적 답을 제공한다. 지금은 고색창연하게 되어버린 기독교의 전통과 지혜가 얼마나 현대적 가치와 혁명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알면 놀랄 것이다. 교회 또한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인류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포획되어 병들어가는 심성과 인격과 덕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뼈를 깎듯이 고민해야 하고 교회의 신앙 교육을 환골탈퇴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 생활은 반그리스도적 욕망을 부추기고 훈육하는 자본주의의 경제 질서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해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고 가르치는데 그런 예수가 자기 동족을 규율하고 훈육하는 당시의 식민지적 경제적 질서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인식과 저항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없고 인간의 왜곡된 욕망의 질서를 치유할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실존적 확신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개입과 앙가주망으로 발전하고 심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형성해서 자본주의의 초자연적 영을 분별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 책이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실존적 체험을 넘어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신실한 통전적 제자도를 사모하는 이에게 좋은 규율로서 작용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