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수평론

약자를 위한 철학과 그 리뷰

약자를 위한 철학-베유 『중력과 은총』

 

강신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18일』에서 마르크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이것은 공화정에서 독재정으로 이행했던 로마의 비극이 당시 프랑스에서 희극적으로 반복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마르크스의 위트 섞인 표현이다. 이것은 기독교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조롱이기도 하다. 예수의 정신은 중세 시대 카톨릭 교단에 의해 ‘비극’으로 변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가톨릭 교단에 면죄부를 사야할 정도로 예수의 사랑이라는 정신은 타락한 것이다. 신과 신의 아들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결국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 심지어는 원수마저 사랑하려고 했던 예수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예수의 정신을 새롭게 살리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가톨릭 교단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운동이다. 프로테스탄티즘 운동 즉 개신교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개신교는 자신이 탄생했던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헌금의 액수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그렇지만 상황판이나 회보를 통해 개신교 측은 신도와 헌금 액수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개신교는 경쟁을 유도하는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과거 가톨릭 교단의 면죄부 논리를 비판할 자격을 개신교는 스스로 벗어던진 것이다. 이제 예수의 정신은 개신교 측에 의해 다시 ‘희극’으로 변한 셈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의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설교하는 개신교 목사의 모습은 어떤가? 과거 가톨릭 교단에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를 거쳐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역설했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 말이 가진 혁명적인 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육신을 낳아준 아버지보다 우리의 영혼을 창조한 하느님이 진정한 아버지라는 선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족, 민족, 인종이란 육체적 구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을 유일한 아버지의 피조물로 볼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지역 종교가 아니라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이 있다. 이제야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함축하는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을 지배했던 로마인마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란 민족적 구별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예수가 어떻게 이런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입장에서 로마인은 원수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두 자신의 피조물 즉 자식들에 지나지 않는다.

세 명의 자식을 둔 어느 아버지가 있다. 불행히도 막내 아이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성하지 않다. 아버지는 세 명의 자식 중 누구에게 가장 애정을 기울일 것인가? 당연히 막내 아이일 것이다. 몸이 성한 나머지 두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그들은 막내 동생을 사랑하고 돌볼 때 아버지가 가장 흡족해하리라는 것, 그리고 오직 그럴 때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하느님=아버지로 확장해보자. 기독교도들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노동자들일 것이다. 물론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라면 남성보다는 여성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아이로니컬한 일 아닌가! 예수의 정신 혹은 기독교의 정신은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 교회에 있지 않고 해방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해방신학에 따르면 노동자, 빈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면 누구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임할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몬 베유라는 프랑스 여성 철학자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억압받는 자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은밀한 기도를 직접 들어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웃을 도와야 한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되기를! 불행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인이 보낸 노예가 될 것. 주인으로부터 오는 도움은 노예를 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을 향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아버지를 위하여 고초를 당한 것이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하여 인간들을 위하여 고초를 당한 것이다. 노예는 주인을 섬기면서 주인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노예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에게 가기 위하여 맨발로 못 위를 걸어간다 해도 그것은 고초를 겪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베유, 『중력과 은총』)

 

“내 마음 알지. 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편은 아내에게 연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인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 대신 무거운 짐을 들거나 아내를 위해 청소해본 적도 없다. 심지어 아내가 추위로 몸을 떨 때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볼 뿐 목도리를 풀어서 그녀의 목에 둘러준 적도 없다. 정말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고난과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려는 마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언제나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니까 가난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랑은 최종적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대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기도 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줄 때 우리는 사랑이 이를 수 있는 극한에 도달할 셈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생명을 주는 행위는 사랑을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생명을 얻은 타인이 대가를 주려고 해도 이미 그를 위해 죽은 사람은 대가를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유는 확신했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주었던 예수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극한이자 표준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되기를!” 물론 기도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생명마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극한적이고 지고한 사랑에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은 불가피한 일이다.

기독교 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신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사랑하라고 자신을 세상에 보낸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던 착한 자식이었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나쁜 자식이다. 그래서 베유는 우리가 “불행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인이 보낸 노예”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결국 베유에게 있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불행한 사람에게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삶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가기 위하여 맨발로 못 위를 걸어간다 해도 그것은 고초를 겪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왜 베유가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워버렸는지를. 그녀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노예 즉 진정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강신주 (2011), 『철학이 필요한 시간』, 사계절, 2011, 278-283쪽〕

<리뷰> 만약 강신주의 이해대로 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제자신경을 고백하고 살아야 한다.

1.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나의 자식이다.

2. 나의 자식이 원수든 친구이든 햇빛을 골고루 내려주기 때문에 차등하면 안 된다

3. 따라서 나는 유대인이든 그 원수 로마인이든 사랑해야 한다.

4.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로마인을 사랑해야 한다.

5. 역으로 예수의 명에 따라 로마인도 유대인을 사랑해야 한다.

6. 그러나 로마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7. 따라서 예수는 유대인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로마인을 질타하고 있는 셈이다.

8.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자식이므로 나 역시도 모든 타인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인식하고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9.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박탈당한 자녀들을 아버지의 자식 사랑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 이렇게 하려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11. 결론적으로 세상의 불의와와 가난과 싸우는 것은 원수 사랑의 마음을 필요로 한다.

12. 그러고 보면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싸우면 세상의 불의에 질 것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전달한 셈이다.

13. 세속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도덕적 우위성을 내면화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권세와 싸울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과 공력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4.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지시하며 이는 세상의 권세와 싸울 수  있는 근본 전투 식량을 제공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세상의 권세와 싸우는 근본 투지요 에너지이다.  

15. 이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의 근본 의도이다.

16. 이러한 고백과 예수의 명령은 하나님의 가치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모든 악과 싸우는 하나님의 역설적 전략과 전술이요 원대한 포부이자 전망이다. 

17. 사실, 우리는 누구든지 세상의  불의한 현실을 대적하기 위해 그 악인과 악행을 원수를 사랑하는 자세로 대하지 않고서는 이길 수가 없다. 예수의 길과 삶은 이것이야말로 승리의 유일한 토대이고 방법이라는 것을 증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6차례의 재판을 거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18. 죽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자들이 12사도들이고 순교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부활이 그 방법의 정당성과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며 사망을 이기는 것이며 사망을 사망에 처하는 것이다.

20.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세상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것은 하나인 셈이다.  

덧붙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도덕적 우월성의 형성과 획득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고백을 깊은 곳에서 철저하게 육화하는 데서 가능해진다는 점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권세에 놀라고 눌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도덕적 인격성과 우월성이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세상의 권세를 제압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이르는 도덕적 우월성 및 그 단련 없이는 승리는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류의근)

'예수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체의 사망과 부활  (0) 2016.09.20
예배의 정치적 성격과 기독 시민 교육  (0) 2016.09.20
세계 환경의 날을 사는 그리스도인  (0) 2013.06.18
2013년 신년사  (0) 2013.02.18
18대 대선 후기(역사편)  (0) 201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