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되기: 무엇을 믿는가? 성서부산 정기 공동예배 2013 1. 27. 5 PM
본문 말씀 요 3:1-21
1. 니고데모의 무지
니고데모는 유대 공의회 권력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의 종교 지배 체제의 위계 질서상 한기총 회장, 교단 총회장 등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예수에게 낮에가 아니라 밤에 은밀히 방문한다. 한 수 배우려고? 예수살렘 체류 동안 예수가 보여준 이적과 표징과 기적에 혹한 다른 많은 바라새파처럼 그도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랍비라고 시인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 최고 종교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고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의 바람 즉 성령의 소리나 음성을 듣지만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감을 못 잡는다고 가르쳐 준다.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 이스라엘의 최고 선생이면서 말이다. 물은 세례자 요한의 물이다. 물로 세례를 받으면 그것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행동과 실천을 해야 한다는 그 물의 세례다. 니고데모는 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물로 세례를 받았으면 정결하게 되었고 더러움과 우상을 깨끗하게 버릴 것이며 새맘이 되고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킬 것이므로.(겔 36:25-27) 아직까지 요한의 수준에도 못 이른 것이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그래서 그는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또는 거듭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니 성령의 소리 면전에 있어도 성령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이상스럽게 들릴 수밖에 없다. 예수에게는 이상한 말이 아니고 당연한 말이지만 영문을 모르는 니고데모,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파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말일 수밖에 없다. 유대 민족의 지배자(ruler)가 하나님의 지배(rule) 즉 통치를 모르는 셈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실천해야 하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살고 헌신해야 하는 이스라엘 최고 종교지도자는 세례도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영도 새맘도 받지 못한 셈이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이해불가이다.
그런데 요한을 그것을 보았고 보았으니 증거하고 증언했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자신의 사회적 특권과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증거는 자신이 누리는 종교적 영광과 귀족적 삶을 포기하는 데서 확인될 것이다. 그는 빛 있는 데로 오지 못했다.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답게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성전 종교, 제도 종교만을 믿었을 뿐 예수와 요한의 일원일 수 없다. 유대 민족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줄 아는 신앙과 신학과 성전 종교와 체제에 갇혀 있다.
예수가 또는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의 진의는 에스겔이 맑은 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영을 받고 새맘이 되어서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대로 살아라고 선포한 것처럼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영과 물로 거듭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과 율법을 지켜서 행동하라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을 신비화해서 영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도래하도록 행동하고 실천하라는 말이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말과 사건과 일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일어난 이 일을 요한이나 예수가 증언하는 데도 너는 아직 알아 듣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듯 땅의 일을 말하고 있는데도 믿지 않거늘 하늘의 신비한 일을 말하면 어떻게 이해하고 믿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와서 이 땅에서 보여주는 일들부터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빗대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로써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억압과 성전 지배 체제의 고통과 희생, 이스라엘 백성의 죄책감, 불신앙, 유배감, 종교 귀족들의 기득권 향유 등에 대해서 질타하는 말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 없음, 현 식민 상태와 국가 없는 유랑 생활에 대한 한과 억눌림, 하나님에 대한 원망, 메시아에 대한 앙망과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너는 회개조차 할 생각도 마음도 아예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고 선생이요 지도자인 네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합당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질타하고 가르치는 바, 즉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또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렇게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에게는 이것이 없으니 성령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뿐이니 영에서 난 것은 너에게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될밖에.
예수는 니고데모더러,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구약을 좀 안다면 에스겔이 이해하고 말한 바와 같이 그 정도는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영생: 예수처럼 세상을 사랑하기
나 즉 예수는 그 정도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즉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그것을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요한의 증언이다. 요한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모세가 기둥에 단 뱀에 비유해서 영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다시피 기둥에 달린 뱀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면 생명을 얻고 죽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니고데모와 너희 백성들이 보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한 죄와 뱀의 유혹을 치유하는 십자가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무회개와 유랑 생활과 한, 그리고 메시아 신앙, 너희 백성들의 식민지적, 제국적 비인간적 방치로부터 오는 모든 고통와 파토스를 대신 치유해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식민 생활과 유랑 생활은 그들에게 어떤 한을 낳았을 것이고 그러나 스스로는 치유할 수 없고 치유하려고도 하지 않을 터인즉 이로부터 어떤 속죄양, 희생양이 필요하다. 이 희생양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유와 구원의 카타르시스를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마침내 주와 그리스도로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스스로는 치유도 능력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갚아주는 행위는 그 의미와 가치를 아는 자에게 그것이 영원한 삶ㆍ생명 즉 영생으로 새겨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삶은 고난이고 수난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런 삶과 생명은 그것을 믿고 모방하고 따라 사는 자에게도 역시 동일한 영원한 생명이지 않겠는가? 이를 요한은 그 사태, 그 행위, 그 희생, 그 고통의 삶을 믿고 견디고 사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고 기록했던 것이다(요 3:15). 나아가서,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예수의 행동과 실천의 삶, 이것을 두고 요한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진술한다. 이미 수백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과 백성의 삶은 바닥이었지만 그래서 온 세상은 악마의 손에 처했고 세상은 어둠에 의해 지배된 세상이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은 그런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사 일으킨 사건이라고 진술한다. 죄와 악으로 물들어 있는 이스라엘이지만 이스라엘의 그런 죄와 악을 짊어지고 가서 죽는 예수, 이렇게 죽어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악과 죄와 어둠을 멀리하는 것이며 진리를 믿고 행하는 것이며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심판과 저주와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요 3:16). 이와 같이 세상을 강렬하게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은 영생을 주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고통의 삶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인류가 더 이상 그 이상 가는 최고의 존재 방식과 삶의 길을 구안해 낼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할 생명의 삶이라는 점에서 영원 불변하는 최고의 삶 또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삶을 살다 간 예수,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현시되는 이러한 예수를 믿는 사람을 어떻게 심판하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최소한도로라도 보호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존재로 남는 한은 존중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 예수는 세상이 악한 자의 손에 있어서 죄와 악이 관영하기에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한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요 3:17). 따라서 그런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행위에 동참하는 일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홀대되어서는 박대당해서는 핍박당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선택과 행동이 악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요 진리의 빛을 미워하는 것이요 빛으로 나아오지 않으려고 하는 행위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한 행위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을 저지르는”(요 3:20) 직전의 사태에 해당한다. 반면 예수에게로 나아오려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며 자기의 그런 행동이 하나님 안에서 수행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며 니고데모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그런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 거꾸로 표현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난다고 함은 단순히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나의 개인적 구주로 고백하는 그런 개인적 신앙 고백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둠과 빛, 비진리와 진리를 선택하는 행동의 문제로서 나타난다. 요한은 니고데모를 평하기를, 그는 진리를 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고 그의 행동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우리의 믿음에 대한 반성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 예수는 밤에 찾아온 이스라엘 선생 니고데모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회개와 반성의 계기를 공안을 던졌으나 그 도전은 수포로 돌아갔고 거부했고 믿지 않았고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니고데모보다 나은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기에 니고데모와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가? 우리는 니고데모에게 수수께끼처럼 들렸던 예수의 말씀의 의도대로 행동하며 살고 있는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는가? 악이 시도 때도 없이 횡행하는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을 비추어주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영생의 삶을 영위하는가?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강렬하게 사랑해서 심판과 판단에서 제외된 예수의 자발적 사랑을 실천하는가? 나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행동을 하지 않기에 나의 행위가 드러날까 봐서 두려워하는 신앙이 아닌가?
빛을 거부한 흑암의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을 주며 영생의 삶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이 보기에 악한 세상에 자기 생명을 바치는 일로서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어쩌면 비정상적 광기이다. 이러한 광기를 자신의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선택하고 좋아하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 난 삶이다. 다시 한번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새긴다. (류의근)
'성서부산을 사는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디어 교회 이름을 정하다-풀꽃강물교회 (0) | 2013.10.08 |
---|---|
국정원 18대 대통령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한 기독인 시국 선언문 (0) | 2013.06.24 |
[복음과상황] 성서부산人 인터뷰 - 이재안 전도사 (0) | 2013.01.28 |
부산그리스도인 대선토론회 준비 및 종료 후기 (0) | 2012.12.04 |
4차 대선토론회 <교육영역/신라대 류의근 교수> (0) | 201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