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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부산을 사는 사람들

[복음과상황] 성서부산人 인터뷰 - 이재안 전도사

작은 자들의 '물레'를 꿈꾸다
[266호 편들고 싶은 사람] 부산 동구쪽방상담소 상담원 이재안 전도사
[266호] 2012년 12월 27일 (목) 10:49:19 김은석 warmer@goscon.co.kr

저녁 6시, 부산역에 도착했다.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다가온 겨울을 알리는 듯했다. 광장 계단 밑 화장실을 가는 길에 노숙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이른 저녁인데도 자리를 깐 이들도 있었다. 역사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반짝이며 자신을 맞이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길바닥에 누운 이들 사이를 공허한 표정으로 가로질러 갔다. 노숙인과 쪽방촌 사람들의 생존이 더 위태로워지는 계절, 겨울이다. 그들이 위태로울수록 바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새해 <복음과상황>이 처음으로 편들고 싶은 사람, 이재안 전도사(39, 새날교회, 부산 동구쪽방상담소)도 바쁘고 골치 아픈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전도사는 부산기독교윤리실천운동(부산기윤실) 간사로 6년간 일했고, 부산교회개혁실천모임과 성서한국부산연대, 부산예수살기 등에 함께하며 폭넓은 활동으로 2000년대 부산 지역 기독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젊은 운동가다. 그가 부산 동구쪽방상담소 ‘희망나눔방’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희망나눔방’은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부산동노회 사회선교협의회가 쪽방 주민과 노숙인들에게 취업 정보와 복지 및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2000년에 설립한 기관이다. 인터뷰할 자격이 없다며 손사래 치던 그를 어렵게 설득해 11월 28일과 29일 이틀에 걸쳐 만났다.

   
▲ 이재안 전도사 ⓒ복음과상황 이종연
쪽방상담소 일은 언제 시작하셨나.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은혜를 받는 성향이 있었다. 교회에 돈 달라고 찾아오는 노숙인들에게 500원밖에 안 주냐고 교회 어른들께 따진 적도 있다.(웃음) 부산기윤실 일을 그만두고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면서 틈틈이 무료급식소 봉사활동을 했다. 부산 밥퍼나눔운동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동구쪽방상담소 예전 사무실이 7분 거리였다. 상담소 일이 우리 동네일이고 내 이웃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관심이 안 갈 수 없어서 이런저런 일을 돕게 됐다. 그러면서 소장님이 같이 상담소 일을 하자고 하셔서 2009년 여름부터 상담원으로 일하게 됐다.

쪽방상담소 상담원이라고 하니까 잘 와 닿지가 않는다. 주로 무슨 일을 하시는 건가.

쪽방 주민들이 찾아오면 상담을 해서 어려운 게 무엇인지 듣고, 필요한 조치를 해 드리는 게 기본적인 업무다. 사실 우리 상담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쪽방 주민들이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걸 방지하는 일이다. 우리 상담소에 등록한 분들이 약 250명이다. 그중에 20% 이상은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신다. 노숙과 쪽방을 오가며 사시는 분들도 많다. 쪽방에 사시는 분들 대부분은 정부에서 월 40여만 원씩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다. 한국은 가난할수록 가계에서 주거비와 난방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나라다. 그 좁은 방 월세로 12~15만 원이 빠져나간다. 그래서 쪽방 대신 부산역을 택하는 분들도 많다. 겨울이면 동사(凍死)하는 분들이 꼭 있다. 지난주에도 부산역에서 한 분이 돌아가셨다. 대부분 만성질환을 앓고 계셔서 거리에서 방치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4년 일했는데 매해 예닐곱 분과 이별하는 것 같다. 쪽방에서 지내시는 분들은 전기장판 하나에 의존해서 겨울을 견디신다. 방에 들어가면 양말을 신었는데도 발이 시릴 정도다. 그런 분들 찾아뵙고, 전기화재 위험 환기시켜드리고, 가끔씩 119 구조대 역할도 한다. 오늘도 스물네 살짜리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처리를 못해서 하루 종일 골치를 앓았다.

   
▲ 부산역 앞의 한 노숙인 ⓒ복음과상황 이종연
상담소 공간이 밖에서 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쾌적하다.

쪽방 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좁아서 생활도 불편하고 샤워도 잘 못하시니까 여기 와서 좀 편히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꾸몄다. 여름에 엄청 더울 때 상담소에 오셔서 더위도 피하고, 공용 샤워실을 이용하러 오시는 분들도 많다, 생필품 같은 게 많이 부족하니까 준비해서 지원해 드리기도 한다. 2009년부터는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와 연계해서 쪽방 주민들과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희망의 인문학’이란 강좌도 열고 있다.

일하시면서 다양한 분들을 만났을 텐데 어떤 분들이 기억에 남나.

기분 좋은 기억과 아픈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 몇 달 전부터 노숙인들이 안정된 주거 공간에 정착하도록 돕는 임시주거지원사업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노숙인들에게 쪽방을 잡아 주고, 일정 기간 기초생활수급을 받게 해 드리며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올해 노숙인 30여 명을 쪽방으로 안내해 드렸다. 그 중에 부산에서 10년간 노숙한 ‘땅콩’이라고 불리는 여자 분이 있다. 누님으로 모시고 있는데, 노숙인들 사이에서 엄청 유명한 분이다. 이분이 임시주거지원사업 대상자로 교육도 잘 받으시고 쪽방 생활도 잘 하고 계시니까 다들 놀라고 있다. 예수님도 답을 못 낼 사람이라고 했는데 변하는 걸 보면서 희망을 발견한다. 가끔씩 술 드시면 밤 열두시쯤 전화하는 게 피곤하긴 하지만.(웃음) 우리 상담소에 등록된 분 중 어릴 때 부산대 앞 시위 현장에서 굴러다니던 최루탄을 손에 잡았다가 그게 터져서 시력을 잃은 분이 계셨다. 보상을 받으려고 소송도 진행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셨는데 상담하며 법적 지원을 진행하는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런 분을 끌어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복음과상황 이종연
교회와 관련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는 어떤 어머니는 정부 지원금 받아서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셨는데, 교인들이 자기를 거지 보듯 바라보며 싫어한다고 울면서 말씀하신 일도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 걸린 어떤 분은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교회가 없다. 교인들이 받아주질 않는 거다. 아는 교회에 연결해 드리긴 했는데 당분간 비밀리에 다니라고 했다. 물론 교역자 입장에서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래도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는 게 교회인데 그럴 수 있는 분위기와 구조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쪽방상담소가 지역 교회와 연계해서 하는 사업은 없나.

각 상담소마다 입장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큰 교회 후원을 거의 받지 않는다. 내 생각이지만 큰 교회가 후원을 하게 되면 봉사받는 사람들보다 봉사하러 온 사람들 신경을 더 쓰게 되고, 쪽방 주민들이나 노숙인들은 도구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찾아오는 교회들이 있다. 가능하면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안내하는데,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지난해 지성근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함께하는공동체교회가 성탄 헌금 전액을 기부했고, 교인들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쪽방 중 한 곳을 방문해서 차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자리라면 더 많아졌으면 하는데 여력이 없다보니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좋은 자원활동가들이 결합되면 해볼 만한 일이라고 본다.

동구쪽방상담소 ‘희망나눔방’이 관여하는 사업 중에는 ‘매축지마을 마을 만들기’ 사업도 있다. 쪽방촌 못지않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부산 동구 범일5동의 매축지마을은 3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집에 부엌, 화장실, 땔감은 없고, 빈집, 공동화장실, 노인은 많았다. 그래서 3無3多로 불리던 동네고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이었다. 영화 <친구>와 <아저씨>의 촬영지로도 많이 알려졌다. 2년 전 부산 지역 언론인 <국제신문>에서 부산 지역의 빈곤 상황을 조사했는데, 매축지마을의 열악한 상황이 부각되었다. 마침 부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슬럼 지역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을 공모했는데, 평소 공동체운동과 마을 만들기에 관심이 있던 이재안 전도사는 매축지마을을 대상으로 사업 기획안을 만들어 응모하여 선정되었다. 부산동구청과 함께 주거환경개선사업을 벌였고, 마을 만들기 사업의 거점으로 빈집을 개조한 공간 ‘우리 동네 사랑방 마실’(이하 사랑방)을 만들어냈다. 사랑방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마을 기업 인사이트영이 운영하는 ‘골목 갤러리 정(情)’과 함께 매축지마을의 상징적인 곳이 되었다.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 매축지마을의 상징이 된 '우리 동네 사랑방 마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쪽방상담소가 마을 만들기 사업을 맡은 것은 전국적으로 유래가 없다. 애초부터 마을 만들기나 공동체 살리기 등의 운동에 소장님이 비전을 품고 공감하고 계셨고, 사업에 공모한 것도 소장님의 권유로 가능했던 일이다. 매축지마을은 재개발 예정지로 오랫동안 도시정비사업이 멈춰 있던 동네다. 그래서 사업 초기에 재개발을 기다리는 주민들이 심하게 반대했다. 재개발 대상 지역이어서 공사를 못하는데 구청이 나서서 빈집 리모델링을 하니 혹시나 재개발을 안 하게 되는 건 아닌지 의심한 거다.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쪽방상담소에서 사회복지서비스를 하려고 한다고 안심시켰다. 실제로 우리 상담소에 등록된 기초생활수급자 열다섯 분이 매축지마을에 사신다. 마을 사람들이 3개월 정도는 경계를 하시더라.

아까 보니 마을 분들이 소주도 한 잔 권하고, 밝게 인사하는 걸 보니 이제 경계심은 다 풀린 듯하다.

물론이다. 지난 6월 개소한 사랑방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오며가며 편하게 들르는 다방이자 하굣길 아이들이 수시로 책을 빌리러 오는 도서관이다. 마을 만들기 사업에 반영될 의견을 내기 위해 매달 한 번씩 하는 주민 회의도 사랑방에서 열린다. 최근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사진 교육을 받고 손수 찍은 사진으로 사랑방에서 전시회도 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주민들이 지금은 사랑방이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올해 행정적인 잘못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부터 마을 만들기 사업의 지원금을 못 받게 됐는데, 마침 헬프에이지라는 단체와 연결되어서 사업 지원금을 받게 되었고, 소장님께서 기업 쪽 후원을 좀 받으셔서 계속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10년 정도 내다보는 사업이지만, 내년 가을 무렵이면 어떻게 될지 윤곽이 나올 것 같다.

살고 계신 동네에서도 마을운동을 하신다고 들었다.

제가 사는 곳은 매축지마을만큼이나 슬럼화 된 산동네다. 부산시가 ‘산복도로 르네상스’라는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 동네가 대상 지역이다. 마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슬로산복커뮤니티’라는 주민협의회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외부의 지원을 받으려하기보다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운동을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울리게 되고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공동체운동도,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금 몸담고 계신 새날교회 이야기도 궁금하다.

22년 된 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의 작은 교회이고 나는 월급 안 받는 협동전도사다. 담임목사는 상담소 소장인 안하원 목사님이다. 우리 교회는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민중교회로 시작해 부산 지역 에큐메니컬운동에 앞장서 왔다. 교인 중에는 부산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이나 사회복지단체 상근자들, 진보 정당의 당원들이 많다. 우리 교회는 교인들에게 교회 안에서 활동하기보다 사회에 나가 사회복지활동이나 시민운동에 꼭 참여하라고 강조한다. 목사님이 대표적이다. 부산 지역에서 사회운동에 왕성하게 참여하실 뿐 아니라 부산생명의전화 심야 자원봉사도 10년 넘게 하셨다. 평등한 분위기 속에서 교인들과 목회자가 함께 일하려고 애쓰는 교회다. 여러 한계들도 있다. 앞으로 열린 구조 안에서 젊은 세대를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가 과제다. 개인적으로는 내년 쯤 따로 교회를 시작할 계획이다.

   
▲ 매축지마을 어르신들과 이재안 전도사 ⓒ이재안

보수적인 교회 출신에 고신대를 나온 걸로 아는데, 사회문제나 공동체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청년기에 교회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조주환 장로님이란 분이다. 그분을 통해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하며 프란시스 쉐퍼의 책을 읽고 라브리공동체를 알게 됐다. 여수룬출판사에서 나온 로버트 뱅크스의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상>, <1세기 교회의 예배 모습>도 읽고 몬드라곤 공동체를 공부하면서 공동체를 갈망하게 됐다. 스물일곱 살이었나, 율리히 두크로의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대안>을 읽고 교회가 자본주의의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활동가의 삶에는 어떻게 들어선 것인가.

원래 신학을 하려고 마음먹고 고신대에 편입을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였는데 봐 줄 사람이 없어서 학교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수업을 듣는 등 2년 과정을 고생스럽게 6년 만에 마쳤다. 신학을 하고 교육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내적 갈등은 딱 한 가지, 금전적인 문제였다. 교육전도사 시절 신문배달을 3,4년 하고 영어 학습지 교사도 했다. 숟가락 광내는 일도 했다. 교육전도사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되니까 아내 역시 대형마트에서도 일하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0년대 초였는데 아내와 갑론을박한 끝에 신학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러고 나서 사회복지 쪽 일을 할지 기독운동을 할지 고민했다. 마침 기윤실 회원이었기 때문에 기독운동을 먼저 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기윤실 간사에 지원한 게 시작이었다.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개인적으로 전환점이 된 일이 있다. 여수 출입국관리소에 큰 화재가 나서 이주민 인권이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부산에도 출입국관리소가 있어서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며 이주민대책운동을 접하게 되었는데 사회복지나 약자에 대한 생각이 변하게 됐다. 그때부터 ‘약자를 위한 실천’을 넘어 ‘약자와 함께하는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조직에 관여하면서 부산 지역 기독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시는 것 같다. 지역적 한계 때문에 느끼는 어려움 혹은 아쉬움은 없는지.

지역에서 운동하시는 분들이라면 비슷할 것 같다. 마치 서울, 즉 중앙의 기독운동을 거쳐야 검증이 되는 듯한 풍토가 있다. 나도 4,5년 전에 아내와 “우리 그냥 서울생활 한번 하고 올까”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끼리 해 나갈 수도 있는데 중앙의 지원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어디든 미시적 측면에서 모두 지역이다. 각자의 지역에서, 가장 작은 단위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해내는 게 중요하다. 변방의 열등감을 갖고 하기보다 주체성을 갖고 해야 한다. 운동을 하는 데도 기본적으로 크기를 신경 쓰는 것 같다. 두세 명이 모이더라도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조금씩 도전하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경험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운동의 공동체성도 중요하다. 성서한국 부산연대에 함께하는 분들과 공동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가족 모임도 하고, 공동예배를 드리자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두어 번 모였는데 참 좋았다. 공동체적으로 만나는 게 일상적어야 한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내년에 시작할 교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

누구나 와서 밥 한 끼 같이 먹고 예배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 가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교회가 없어서 못 가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싶다. 가끔씩 일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왜 교회가 자본주의의 대안이어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 주고 싶다.

   
▲ ⓒ복음과상황 김은석
“그냥 방앗간의 물레처럼 살랍니다.” 이 전도사가 매축지마을 사랑방에서 마을의 한 어르신과 얘기하다가 툭 내뱉은 말이 잊히지 않는다. 방앗간의 물레라. 쉼 없이 돌아가며 곡식을 찧는 물레처럼 낮은 곳에서 낮은 자들을 위해 쉼 없이 일하겠다는 말이었을까. 필립 얀시는 “은혜는 물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했다. 흘러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물레가 힘차게 돌아가듯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과 사역에 그치지 않기를.

김은석 기자 warmer@goscon.co.kr